시(詩)/성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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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제미(祭米)시(詩)/성선경 2017. 7. 5. 10:53
참 우리 동네는 재미나는 도깨비만큼이나 참 많은 신들도 함께 살아서 사람 반 신명 반 어울려 살았는데요 그래서 늘 밥 한 술만 떠도 고씨례 고씨례 하고 신명 대접을 했는데요 무슨 무슨 날이다 하면 한 상 잘 차려서 터주대감 조왕신 정랑신까지 골고루 찾곤했는데요 그 중 내가 제일 좋아하던 날이 제미를 하던 말이었는데요 쌀신명 대접한다고 흰 쌀밥에 칼치국에 나물 한 대접을 놓고 먼저 절을 두 번하고 손을 싹싹 빌면서 할머니께서 무어라 무어라 주문을 외면 나는 아무런 의미도 모르면서 분수처럼 마구 흥이 솟지 않았겠어요 제사가 끝나면 쌀밥에 칼치국을 아주 소원처럼 먹을 욕심으로 나도 할머니 따라 싹싹 빌곤 하지 않았겠어요 그러고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마음이나 속이 허한 나이면 봄도 여름도 없이 할매 우리 또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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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쭈글쭈글한 길시(詩)/성선경 2017. 3. 16. 11:37
봉급날 라면 한 상자 샀다. 갑자기 부자다. 배고픈 사자같이 생긴 상자를 북 찢는데 상자 골판지가 쭈글쭈글 주름졌다. 늙은 살같이 주름진 것은 다 고달프다. 골판지는 쭈글쭈글한 할머니 손으로 모은 신문지 등 폐지로 만든다는데 생의 끝도 주름졌다. 파란만장 현생이 주름지면 다음 생도 주름질까? 냄비에 물을 올려놓고 라면 한 봉지를 척 끓이는데 꼬불꼬불 주름졌다. 나는 후루룩 후루룩 주름살을 마셨다. 아마 내 살도 이미 주름으로 채워졌으리라. 마흔 일곱이 벌써 고달프다. (그림 : 변응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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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삶, 편지시(詩)/성선경 2016. 12. 4. 15:20
진정 내가 가야 할 길이라면 그 길 조금도 후회하지 않겠다. 우표를 붙이고 주소를 적고 총총히 내가 가야 할 우편번호를 따라 내 닿아야 할 그곳 기쁘게 가서 닿겠다 먼 훗날 또는 가까운 장래 혹시나 하는 염려가 뒤따르더라도 결코 뒤돌아보며 한숨짓지 않겠다 먼 길을 가다 때로는 이지고 험난하여 간혹 알지 못할 서러움에 잠길지라도 진정 내가 가야 할 길이라면 지극히 평온한 얼굴로 그에게로 가겠다 문득문득 내가 가 닿아야 할 그곳에서 조그마한 기쁨이라도 되었으면 하고 꿈꾸며. (그림 : 이영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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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포장마차여 영원하라시(詩)/성선경 2016. 12. 4. 15:18
애인(愛人)과 냄비우동을 위하여 단돈 천 원의 넉넉함을 위하여 포장마차여 영원하라 찬바람이 잦은 우리의 겨울 저 바람막이의 오뎅국물을 봐라 낯선 만남이 있어 술잔을 나누어도 손 흔들면 쉽게 잊히는 안온함 김밥처럼 말려가는 세상에서 얼마나 넉넉한 나라냐 삼백 원 우동의 따뜻한 새참에 후루룩후루룩 국물을 들이키면 첫눈이 논다 펄펄 김을 날리며 애인은 흰 가락으로 흩어져 늘 내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휘감아 오나니 자주자주 술병으로 쓰러지는 젊은 날의 봄꿈에도 소주 한병이면 넉넉한 포장마차여 영원하라 단 한 번의 평등한 건배와 그 취기로운 자유를 위하여 애인과 냄비우동을 위하여 (그림 : 김종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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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마늘 한 접시(詩)/성선경 2016. 12. 4. 15:15
세상에 믿을 것이 없다는 것은 저문 들녘에 서서 불타오르는 노을을 보면 안다 내일이면 해는 또 떠오를 것이고 다시 들녘에 나와 물꼬도 틔우겠지만 한 철의 노동을 마감하면서 내 씨알 같은 땀방울들이 저토록 허망한 기포같이 떠올라서야 마늘 한 접이 금 가면 못 쓰는 플라스틱 바가지 하나보다 못한대서야 어찌 믿을 수 있으랴 소금 같은 세상 그 곰보 같은 세상, 생각하면 누구의 이름을 빌려 욕할 수 없는 농투산이가 그저 미울 뿐이다. 멜론이나 키위들이야 미더울 것이 못 된다는 것은 저 건너 또 다른 대륙에서 넘어온 이름이어서 코쟁이 코 풀고 지나가면 남는 휴지쪽처럼 냄새를 풍기며 썩을 수도 있겠지만 이 땅의 소금쟁이 벌거숭이 농투산이들 저 근본 같은 내음의 마늘 쑥조차 저렇게 불붙어 타오른다면 어찌할거나 이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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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비빔밥을 먹으며시(詩)/성선경 2016. 12. 4. 15:12
가끔 비빔밥을 먹으며 세상은 비빔밥 같은 밥상이라 생각하면 한 놈은 고추장이 되어서 세상은 온통 붉다 하고 또 다른 놈은 쉬어터진 김치쪽이 되어서 세상은 위통 썩었다 하고 남은 놈들은 낱낱이 떠도는 밥풀이 되어서 이리저리 뭉쳐 다니며 아무 곳에서나 붙어 와와와 합니다. 어허 저놈들 누가 큼직한 놋숟갈로 이리저리 척척 비벼 뒤섞으면 세상은 저만큼의 색깔로 저만큼의 냄새를 풍기며 고봉밥 한 그릇 잘 엉켜서 떠도는 밥풀 같은 우리들에게 한 숟갈 고운 포만감이 된다는 것을 왜 몰라 왜 몰라 합니다. (그림 : 허영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