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성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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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백화만발시(詩)/성선경 2016. 8. 3. 17:07
아들이 아버지를 업고 건너는 봄이다. 텃밭의 장다리꽃이 나비를 부르면 걷지 못하는 아버지의 신발은 하얗다 중풍의 아버지를 모시고 아들은 삼월의 목욕탕을 다녀오는 길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등이 따스워 웃고 아들의 이마엔 봄 햇살이 환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업고 건너는 봄이다. 아버지의 웃음엔 장다리꽃이 환하고 장다리꽃은 배추흰나비를 업고 건너는 봄이다. 중풍의 아버지를 모시고 아들은 삼월의 온천을 다녀오는 길이다. 장다리꽃이 나비를 부르는 봄이다 나비가 장다리꽃을 찾는 봄이다 걷지 못해도 아버지 신발은 하얗고 뛰지 못해도 아들은 신명이 나 훨훨 장다리꽃이 배추흰나비를 업고 건너는 봄이다. 배추흰나비가 장다리꽃을 안고 건너는 봄이다. 방금 장다리꽃이 빙긋이 웃고 따라서 배추흰나비가 빙긋이 웃어 장다리꽃이 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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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하여가(何如歌)시(詩)/성선경 2016. 8. 3. 16:56
바람이 분다 바람 따라 머리칼을 흩날리며 살면 어떤가 몇 가닥 새치를 기르며 살면 또 어떤가 단추 한두 개쯤 풀고 살면 어떤가 노점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 마시며 살면 어떤가 오뎅 국물을 후후 불며 안주삼아 속 풀며 살면 어떤가 자못 신경이 쓰이는 친구의 이야기도 못 들은 척 아니면 글쎄 뒤끝을 흐리며 살면 어떤가 한 번도 꽃답게 핀 적이 없었다고 너를 위해 뜨거운 적이 없었다고 찔끔거리면 어떤가 사는 것이 투사(鬪士)가 아니면 또 어떤가 바람이 불지 않는다 외투깃을 올리고 땅만 보며 걸으면 어떤가 그렇게 살면 또 어떤가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 가는 나이 마흔 다섯. (그림 : 고찬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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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아카시아 사랑시(詩)/성선경 2016. 8. 3. 16:40
나는 당신을 사랑하였습니다 아카시아 푸른 잎이 꽃잎에 묻히는 캠퍼스 뒤편 담벽에 앉아 사랑의 슬픔을 다듬는 동안 그렇게 나는 행복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이 몇 번씩 아름다운 노을을 지우고 이렇듯 아릅답게 노을진 저녁을 맞으며 더욱 그리운 이 이름을 외우며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나를, 나를, 나를...... 마지막 잎새를 떨구었습니다 아카시아 꽃잎이 다 흩어지기 전에 어둠은 깊어가고 깊은 어둠 속으로 어디론가 떠나간 외로운 사람의 야윈 어깨를 생각하면 울어 버릴 것 같은 이 오월에 나는 당신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림 : 박진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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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걸유(乞宥)시(詩)/성선경 2016. 7. 24. 14:04
용서하십시오. 입춘이면 늘 석양의 과객같이 동백을 찾았으나 뚝뚝 목을 꺾는 모습이 독하다 낯빛을 흐렸으며 봄 햇살같은 백목련을 사랑하였으나 잎보다 먼 저 꽃 피는 것을 꺼려 담장 안에 심지 않았읍니다. 어머니 마중가는 길가에서 한들거리는 강아지풀을 무엇보다 좋아했으나 난초를 곁에 두고 자주 물을 주었으며 내 고향의 불알친구를 깊이 사랑했으나 그보다 동료교사와 더 자주 술을 마셨습니다. 건너야할 다리가 앞에 있었으나 나는 선뜻 건너지 않았고 미루다 미루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늘 내 속에 있었으나 한 번도 괄호 밖으로 나와 보지 못한 이여 부디 용서하십시오 걸유(乞宥) :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한다, 다산 정약용 목민심서 해관육조’(解官六條) 중에서 (그림 : 최석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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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도깨비바늘풀시(詩)/성선경 2016. 6. 27. 17:29
이제 내 이름을 서러워하지 않겠다. 조금의 그리움으로도 목이 매여 옷섶이나 바짓가랭이 혹은, 삽살이의 그림자에도 맺혀서 잔잔히 묻어나는 나의 사랑 이제는 용서하겠다. 풀꽃답게 피었다 시드는 꽃을 맺어도 나의 감성이 예쁜 덧니로 돋아나도 세상은 때때로 물뱀보다 독사같아서 이 징글시런 놈 혹은, 이 낮도깨비같은 놈 하고 욕을 퍼부어도 나의 근끈한 사랑 변명하지 않겠다. 풀꽃 중에서도 더 아름다운 화초이기를 이름 중에서도 더 빛나는 명사이기를 꿈꾸지 않겠다. 그냥, 낮도깨비같은 도깨비바늘풀. (그림 : 김대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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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찬밥시(詩)/성선경 2016. 6. 27. 17:27
아이를 가지고 입맛이 없다는 아내를 위하여 찬밥 한 그릇을 말아 멸치 몇 마리와 함께 들여온 나는 온갖 너스레를 다 떤다 내 유년의 고향 얘기며 풋고추며 양파며 된장이며 이 여름 쉬 말은 찬밥 한 덩이가 얼마나 맛나는 별미인지를 그러나 아내여 눈웃음치며 게 눈 감추듯 찬밥 한 그릇을 먹어치우며 생각해 보면 찬밥이 어찌 밥이 차다는 뜻뿐이랴 내가 세상에 나와 오로지 굽실거리며 아양 떨며 내 받아온 눈치며 수모 그 모두 찬밥인 것을 아내는 아직도 입맛을 다시며 재미있다고 깔깔거리고 박수를 치고 제가 배웠던 고등학교 교과서 그 낭만적인 김소운과 한 귀절을 떠올리며 정말, 우리는 늙어서 할 얘기가 많겠다고 스스로 결론까지 짓는 아내 앞에서 더욱 너스레를 떨며 아양을 떠는 나는 누구냐. 가랑비 촉촉히 속으로 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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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경 - 흔들리는 하현달시(詩)/성선경 2016. 6. 27. 17:25
까치밥으로 하나 남겨둔 홍시마저 떨어진 뒤 다만 혼자 저 가지 끝을 붙들고 있는 감꼭지 가늘게 찡그린 외눈박이 눈 참 많이도 울었겠구나. 흑백영화 자막 속으로 흘러내리는 별똥별처럼 점 점 점 자주 글썽이는 외눈박이 눈 한번 해처럼 밝게 빛나보겠다고 난장이가 쏘아올린 바람 빠진 작은 공 저 턱도 없는 꿈 참 많이도 울었겠구나. 누가 내다버린 연탄재같이 아무나 툭하고 차고 싶어서 이젠 빈 맥주 캔처럼 찌그러진 나이. 참 많이도 울었겠구나. (그림 : 강인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