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권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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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희 - 숙희 이야기시(詩)/권선희 2019. 7. 17. 09:39
구룡포발 대구행 아성여객 차장이었을 때 숙희는 한 마리 비둘기였다지요 빨간 명찰 말년 병장 숙박계 날려쓰던 겨울 밤 싸나이 팔뚝에 머리 파묻고 처음 날개를 벌렸다지요 헐거운 여인숙 그 방을 두고 머리채 질질 반장 손에 끌려간 새벽은 세찬 바람으로 오래 울었다지요 태광호도 중심 잔뜩 부풀어 돌아오는데 아무튼 포장치고 회 뜨는 쉰 살 숙희 세꼬시 썰리듯 살아도 첫차처럼 올라탔던 싸나이는 여적 내려오지 않는다지요 명치끝에 아예 눌러 붙었다지요 (그림 : 최창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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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희 - 충분한 슬픔시(詩)/권선희 2019. 7. 16. 12:01
- 머구리 성평전 씨 구석 탁자에 검은 물고기 한 마리 막걸리 한 사발로 숨 고르고 있다 반 쯤 벗어 내린 슈츠에서 뚝 뚝 바닷내 나는 오후가 떨어지고 마른멸치 똥 발라내는 문 밖에서 자전거는 기울고 있다 일흔 생 만조로 차오르도록 장가 한 번 못 가고 포구에 붙어 사는 목숨이지만 바다만은 옳게 접수했노라 호기 부렸으니 궂은 날 물질도 겁낼 수 없었다 까짓 거 이판사판 촌 다방 가스나 하나 들러붙지 않는 몸이지만 실마리 아득한 바다 와락 안고 뒹굴다 나와도 살만했다 머구리 : 다이버나 잠수부를 일컫는 옛말이다. 실제 제주에서는 잠수를 전문으로 물질하는 남자를 ‘머구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머구리는 일본어 もぐる, 우리말로 읽으면 모구루, ‘잠수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변형된 단어로 보인다. 또 우리 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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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희 - 골방블루스시(詩)/권선희 2017. 9. 22. 22:51
자작나무 모텔과 항구다방 사이 골목에 부영식당 있는데요 그 식당 명물은 획 돌아앉은 골방이지요 사내들 지퍼 열며 드는 변소 앞이지만요 호마이카 접이상에 눅눅한 미주구리 한 접시, 얼음 서걱한 콩나물국, 늙은 호박 두툼하게 삐져 넣은 도루묵찌게 오르면요 들추는 겨드랑이마다 핀 하얀 소금꽃, 긁을수록 부풀어 오르는 슬픔도 말입니다 팽팽히 울대 세워 진한 농 한 배만 돌리면 다 엉기는 보일러 잘잘 끓는 겨울밤, 새큰한 신참이 빨간 보자기 펴고 보온병 물커피 뽀얀 김 팍팍 올리면요 낡은 꽃 만발하는 벽에 기대어 무능한 지느러미나 난무한 속설 젓가락질하던 사내들 죄다 무너지구요 불알 떨어진 시계만 아찔하게 익어가는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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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희 - 가을, 구룡포시(詩)/권선희 2017. 9. 22. 22:47
그물과 그물 사이로 고통을 지나 온 여자와 슬픔에게로 걸어가는 고양이 고양이를 뒤쫓는 개와 개를 쫓아내는 여자가 오가는 동안 노랗게 햇살 까고 모퉁이가 휘어진다 우기와 땡볕 사이 군용담요처럼 깔린 바다로 척척 화투장만 던지던 사람들 난파된 선박의 관절 다시 조이고 스쿠류 타고 노는 아비로 돌아가는 길이다 가슴 쫙 편 수부와 수부 사이 서너 근 돼지고기 정도는 우습게 끊는 대목장 설 거기 포기와 망설임과 설렘은 한 항아리에 담겨 있다는 편지 당도하는 거. 기 (그림 : 임재훈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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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희 - 춤추는 바다시(詩)/권선희 2017. 4. 7. 21:38
파도가 오랜된 포구나무 사는 마당까지 밀려와 창문을 두드리면 목젖 부풀리며 열리는 아침 허파꽈리처럼 오종종 매달린 골목은 아홉 살 사내아이들처럼 바다로 달려 나가고 물빛 깊은 눈망울 모여 든 어판장에는 비늘 돋는 삶이 뛴다. 돛을 찢는 노대바람 당당하게 넘어 서면 상처 깁는 명주바람 불어 온다고 팽팽하게 당겼다가 느슨하게 놓아주며 춤추는 바다 고래가 새끼를 낳고 은빛 새가 날아오르는 푸른 경전(經典)의 음절들 타고 넘으며 살아라 살아라 온 몸으로 살아라 춤추는 바다 다시 만조(滿潮)에 붉디붉은 석양을 풀고 새들 무리져 둥글게 날아가는 그 곳에 해바라기처럼 둘러 선 사람들 깊고 너른 장단(長短) 따르며 바다처럼 살고 있다 노대바람 : 내륙에서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강한바람으로, 24.5~28.4 m/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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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희 - 알뜰수선시(詩)/권선희 2017. 4. 7. 21:24
실비주점과 부식가게 마주보고 이발소와 화장품 가게 당겨 앉은 골목에 유리창 가득 햇살 꽂히는 알뜰수선 오래된 재봉틀이 색색의 실 꿰고 페달 밟아 가을을 굴리네요 십수 년이나 묵은 물땡땡이 원피스 닳고 닳은 작업복 무릎도 체크무늬 찢겨진 팔꿈치도 세상 돌다 헤지고 상처난 몸들 켜켜이 쌓인 사연을 하나씩 데려다 눕히고는 오래된 미련은 잘라냅니다 후회 위에는 야무진 다짐을 덧대구요 펴고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돋보기 흘러내리는 오후를 정성껏 박음질 하네요 다르륵 박고 떠나는 재봉틀 소리 양철지붕으로 쏟아지는 여우비 같아요 텃밭 실파처럼 싱그럽게 우리들의 사주가 일어서고 있어요 (그림 : 정원조 화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