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길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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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저물녘시(詩)/길상호 2020. 4. 22. 12:55
노을 사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역 누군가는 떠나고 또 누군가는 남아 견뎌야 하는 시간 우리 앞엔 아주 짧은 햇빛이 놓여 있었네 바닥에 흩어진 빛들을 긁어모아 당신의 빈 주머니에 넣어주면서 어둠이 스며든 말은 부러 꺼내지 않았네 그저 날개를 쉬러 돌아가는 새들을 따라 먼 곳에 시선이 가닿았을 때 어디선가 바람이 한 줄 역 안으로 도착했네 당신은 서둘러 올라타느라 아프게 쓰던 이름을 떨어뜨리고 주워 전해줄 틈도 없이 역은 지워졌다네 이름에 묻은 흙을 털어내면서 돌아서야 했던 역, 당신의 저물녘 (그림 : 김태균 화백) Napoleon Coste - Les Soirées d'Auteuil Op,23 ("Evenings in Auteuil") Thomas Viloteau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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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두 잔 집시(詩)/길상호 2018. 6. 10. 18:11
우리는 처음 만나는 사이, 아니 전생에 두 번쯤은 만난 적 있는 사이 창유리 먼지 낀 불빛에 홀려 지나간 이들처럼 탁자에 마주앉았네 찌개가 줄지도 않고 식어가는 동안 혓바닥 위에 들깨소금만 몇 알씩 털어 넣으며 옆 자리 사람들이 하나둘 희뿌연 김 속으로 사라지는 것도 알지 못했네 한 잔 또 한 잔 전생이 가까워질수록 소주병처럼 푸른 밤이 쌓여가고 주인 할머니는 윤회의 문턱을 드나들면서 몇 번이고 안주를 데워다 주었네 우리는 만난 적이 없는 사이, 아니 이미 전생에 두 번은 헤어진 사이 탁자 속 나뭇결을 한참 헤매다가 서로의 목소리를 놓치고 빙빙 돌다가 끊어진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또다시 두 잔의 술이 필요했네 (그림 : 이우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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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바람이 들렀던 집시(詩)/길상호 2018. 5. 26. 18:09
삽짝 모탱이를 돌아 초여름 바람이 항아리 뚜껑에 쌓여 있던 탑새기를 훅, 불고 지나갈 때 나싱개 나싱개 늦게 피운 꽃들만 마음이 흔들리고 남새밭 싹뚝 잘린 정구지들만 또 고개를 드네 감낭구에 매어둔 누렁이도 양제기에 찰름찰름 출렁이던 햇볕도 저 담벼락 밑에 찌그러져 있는 집, 누구 없슈? 누구 없슈? 소리쳐도 벼름박에 걸린 소쿠데미 올이 풀려 아무 대답도 남아 있지 않은 집, 도무지 기둘려도 대간한 얼굴로 돌아와 저녁을 뽀얗게 씻치는 사람은 없고 삽짝 모탱이 : 대문가 모퉁이 나싱개 : 냉이 남새밭 : 텃밭(채소밭) 정구지 : 부추 감낭구 : 감나무 벼름박 : 벽 소쿠데미 : 소쿠리 기둘려도 : 기다려도 대간한 : 힘든 (그림 : 김대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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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사북시(詩)/길상호 2017. 12. 30. 11:11
식은 이름을 읊다 일어난 아침 입술에도 차갑게 눈이 쌓여 있었다 사북사북, 꿈속 발자국들을 주워 가방에 담고 나는 사북 행 기차를 탔다 구름과 함께 딱 한 번 들른 적 있는 곳, 역사 앞 공중전화박스에 서서 혼선 중인 당신 목소리를 내려놓고 멎지 않는 눈발만 멍하니 바라보던 곳, 지문 속에 말아 넣어둔 낡은 지도를 펼쳐들고 탄가루 뒤집어쓴 약방 간판이나 고드름 매달린 다방의 연통을 떠올리면 기억들은 그 맛이 텁텁했다 탄광처럼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마다 기차는 덜컹덜컹 잔기침을 해대고 나는 사북사북,을 가루약같이 털어 넣으며 창유리에 맺힌 검은 얼굴을 닦았다 언제나 과거형의 철로 끝에 놓여있던 곳, 그러나 폐쇄된 몇 개의 역 이름을 거치는 동안 결코 사북에 닿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발자국들도 어느 틈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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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숨비 소리시(詩)/길상호 2017. 1. 7. 16:53
파고 높은 시간들이 지나간다 물결 사이를 헤매고 다니다가 수면으로 올라온 우리는 어느새 고래처럼 우는 법을 배웠다 깊고 어두운 바닥에서 주워 올린 건 딱딱한 껍데기를 갖고 있는 미소 그리고 헤초처럼 뿌리가 얕은 흐느낌 해류에 떠밀려 흘러가버린 약속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난류와 한류의 감정이 교차하는 이곳 끝날 것 같지 않은 자맥질을 한다 아가미도 없이 헤엄치려면 고래를 따라 다시 진화해야만 했다 참고 참았다 한꺼번에 분기하는 숨 이것은 바다가 일러준 생존법 오늘도 나는 맨살에 물옷을 껴입고 출렁이는 바다로 잠수한다 숨비소리 : 해녀가 잠수 후 수면에서 고단 숨을 휘파람처럼 쉬는 행동 (그림 : 김종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