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길상호
-
길상호 - 강아지풀시(詩)/길상호 2015. 5. 7. 13:34
지난 세월 잘도 견뎌냈구나 말복 지나 처서 되어 털갈이 시작하던 강아지풀 , 제대로 짖어 보지도 못하고 벙어리마냥 혼자 흔들리며 잘도 버텨냈구나 외딴 폐가 들러 주는 사람도 없고 한 웅큼 빠져 그나마 먼지 푸석한 털 누가 한 번 보듬어 주랴, 눈길이나 주랴 슬픔은 슬픔대로 혼자 짊어지고 기쁨은 기쁨대로 혼자 웃어 넘길 일 무리 지어 휘몰려 가는 바람 속에 그저 단단히 뿌리 박을 뿐, 너에게는 꽃다운 꽃도 없구나 끌어올릴 꿈도 이제 없구나 지금은 지붕마다 하얗게 눈이 내리고 처마 끝 줄줄이 고드름 자라는 계절 빈집에는 세월도 잠깐 쉬고 있는 듯 아무런 기척 없는데 너희만 서로 얼굴 비비며 마음 다독이고 있구나 언 날이 있으면 풀릴 날도 있다고 말없이 눈짓으로 이야기하고 있구나 어느새 눈은 꽃잎으로 떨어져 ..
-
길상호 - 마늘처럼 맵게시(詩)/길상호 2015. 2. 5. 02:04
생각 없이 마늘을 찧다가 독한 놈이라고, 남의 눈에 들어가 눈물 쏙 빼내고 마는 놈이라고 욕하지 말았어야 했다 단단한 알몸 하나 지키기 위해 얇은 투명막 하나로 버티며 살아온 너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했어야 했다 싹도 틔우지 못한 채 칼자루 밑에 닭살처럼 소름 돋은 통 속에서 짓이겨진 너의 최후를 떠올려야 했다 네가 밀어 올렸던 줄기들 뽑혀 가던 날 거세당한 사내처럼 속으로 울던 뿌리들의 고통 잊어버리고 기껏 눈물 한 방울이 무엇이기에 누구를 욕하고 있단 말인가 독하면 독할 수록 맛이 나는 게 그런 게 삶이 아닌가, 저 마늘처럼 모든 껍질 벗겨지고 난 뒤에도 매운 오기로 버티는 게 삶이 아닌가 (그림 : 김백자 화백)
-
길상호 - 곶감을 깎는 일시(詩)/길상호 2014. 10. 29. 00:35
햇볕 잘 익은 마루에 모여 여인들이 처마에 매달아 둘 감을 깎는다 좀처럼 떫은맛을 버릴 줄 모르는 단단한 기억들을 가지고 나와 사르륵 깎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칼날을 빠져나온 껍질은 어느새 기억을 더듬는 뒷길 되어 몸을 뒤튼다 가끔 빈 소리로 농담이 오고 갈 뿐 누구도 자신의 길에 눈을 떼지 않는다 메말랐다고 생각했던 눈물샘이 다시 터질 것 같은 자그마한 떨림이 그들의 가슴을 지나갔기 때문이리라 손마디 까맣게 물들고 저녁이 와서 깎은 감을 실에 꿰어 일어날 때 그들의 손에 들려질 것은 더 이상 떫은 감이 아닐 것이다, 처마 밑은 한 사람씩 준비한 연등으로 환해지리라 가을 햇살 숨어들어 검붉게 불을 밝히는, 스스로의 눈물로 밝아지는 등 여인들은 어두웠던 기억을 밝히기 위해 저마다의 연등을 깎고 있는 것이..
-
길상호 - 바람의 무늬시(詩)/길상호 2014. 5. 21. 19:58
산길 숨차게 내려와 제 발자국마다 단풍잎 붉게 물들이는, 잎들뿐 아니라 오래도록 위태롭던 내 마음의 끝가지도 툭툭 부러뜨리는 바람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향천사香川寺 깊은 좌선坐禪 속에서 풍경은 맑은 소리로 바람을 따르고 나의 생각들도 쫓아갔다가 이내 지쳐 돌아오고 마네 이 골짜기 전설(傳說)만큼이나 아득하여서 마음을 접고 서 있네 그랬더니 아주 떠난 줄 알았던 바람 다시 돌아와 이제는 은행나무를 붙잡고 흔들며 노란 쪽지들을 나에게 보내네 그 쪽지들을 펴 읽으며 나는 바람과 나무가 나누는 사랑을 알게 되었네, 가을마다 잎을 버리고 바람을 맞이하는 나무의 흔적, 나무는 깊은 살 속에 바람의 무늬 새겨 넣고 있었네 그 무늬로 제 몸 동여매고서 추운 겨울 단단히 버틴 것이네 풍경 소리가 내 마음의 골짜기에서 다..
-
길상호 - 그림자에게도 우산을시(詩)/길상호 2014. 5. 21. 19:57
차마 나누지 못할 이야기가 있어 그림자 하나씩을 이끌고 왔다 비 내리는 골목 술집을 찾다가 불빛 아래 출렁이고 있는 사람들 그늘진 말들만 모두 담고 있어서 바닥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 씻겨도 씻겨도 어두운 사람, 술잔을 비우면서 우리들은 또 혓바닥에 쌓인 그늘을 보태놓겠지 빗방울이 지우려고 세차게 내려도 발목을 놓지 않는 그에게 살며시 우산을 씌워주었다 발목에 복사뼈를 심고 기다린 무릉도원에 닿으면 그도 일어나 걸을까 발바닥을 함께 쓰는 이곳에서는 손잡아 일으킬 수 없는 사람, 그를 위해 처음으로 내 어깨가 젖었다 (그림 : 박주경 화백)
-
길상호 - 지나가는 말시(詩)/길상호 2014. 5. 21. 19:53
새벽 두세 시 무렵 골목을 지나는 말들 중 간간히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창문 쪽으로 고개 돌리는 그런 말 있습니다. 이 시간의 말들은 대게 술 취해 비틀대기 마련인데 흔들림 하나 없는 눈 끝내 심장까지 물들이고 마는 그 말은 아주 흔한 것이어서 부르튼 내 입술을 거쳐 사라졌던 것이기도 해서 언젠가는 지나가며 내뱉은 말, 너와의 인연은 여기까지 이런 말도 찾아오겠구나 싶어 창문을 닫는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후두둑 투명한 눈동자를 깨뜨리며 유리에 달라붙는 말, 말, 말 오늘도 불면은 계속됩니다. (그림 : 오치균화백)
-
길상호 - 돌탑을 받치는 것시(詩)/길상호 2014. 5. 21. 19:51
반야사 앞 냇가에 돌탑을 세운다 세상 반듯하기만 한 돌은 없어서 쌓이면서 탑은 자주 중심을 잃는다 모난 부분은 움푹한 부분에 맞추고 큰 것과 작은 것 순서를 맞추면서 쓰러지지 않게 틈을 잡아보아도 돌과 돌 사이 어쩔 수 없는 틈이 탑신의 불안을 순간순간 흔든다 이제 인연 하나 더 쌓는 일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벌어진 틈마다 잔돌 괴는 일이 중요함을 안다 중심은 사소한 마음들이 받칠 때 흔들리지 않는 탑으로 서는 것, 버리고만 싶던 내 몸도 살짝 저 빈 틈에 끼워 넣고 보면 단단한 버팀목이 될 수 있을까 층층이 쌓인 돌탑에 멀리 풍경소리가 날아와서 앉는다 (그림 : 이종원 화백)
-
길상호 - 씨앗이 되기까지시(詩)/길상호 2014. 4. 19. 12:07
겨울은 그렇게 견디는 거야 대청마루 낡은 거미줄과 함께 오래 매달려 있는 옥수수처럼 하고 싶은 말 있어도 입 꽉 다물고 있는 거야 장독대 단지의 볍씨처럼 지독한 어둠 속에 갇혀 보기도 하는 거야 몸속에 생명 하나 품기 위해선 모든 껍질을 바짝 말려야 하지 네 몸 속에 지니고 있던 것들 하나씩 허공으로 날려 보내면 한층 너의 눈은 맑아질 거야 조용히 눈감고 떠올려 보렴 지난 봄 어둠 열어 주던 빗소리부터 가을 머리 위에서 춤추던 잠자리까지 그 날개마다 빛나던 햇볕까지 말이야 눈물로 씻어 낸 눈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 모든 걸 볼 수 있었겠어 설마 지금도 들녘에 남겨 두고 온 뿌리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래, 뿌리는 어둠 헤매던 꿈 모두 길어 올리고 땅 속에 영원히 잠자리를 잡은 거야 그 휴식은 이제 흔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