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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곶감을 깎는 일시(詩)/길상호 2014. 10. 29. 00:35
햇볕 잘 익은 마루에 모여 여인들이
처마에 매달아 둘 감을 깎는다
좀처럼 떫은맛을 버릴 줄 모르는
단단한 기억들을 가지고 나와 사르륵
깎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칼날을 빠져나온 껍질은 어느새
기억을 더듬는 뒷길 되어 몸을 뒤튼다
가끔 빈 소리로 농담이 오고 갈 뿐
누구도 자신의 길에 눈을 떼지 않는다
메말랐다고 생각했던 눈물샘이 다시
터질 것 같은 자그마한 떨림이
그들의 가슴을 지나갔기 때문이리라
손마디 까맣게 물들고 저녁이 와서
깎은 감을 실에 꿰어 일어날 때
그들의 손에 들려질 것은 더 이상
떫은 감이 아닐 것이다, 처마 밑은
한 사람씩 준비한 연등으로 환해지리라
가을 햇살 숨어들어 검붉게 불을 밝히는,
스스로의 눈물로 밝아지는 등
여인들은 어두웠던 기억을 밝히기 위해
저마다의 연등을 깎고 있는 것이다
(그림 : 마영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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