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송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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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 덧정시(詩)/송수권 2019. 8. 1. 12:29
약사암을 구릉에 두고 새인봉을 쳐다보는 고갯길 송풍정 앞엔 7백년을 자랑하는 노거수 한 그루가 정정하다 예부터 운림동 마루턱에서 마을 지킴이로 서 있으니 접신을 해도 일곱 번은 더 했을 나이 어따 마시, 우리 그 그늘 속에서 송풍정 보리밥 한 술 어떤가? 정년을 하고 아직도 다리심이 남아 억울하다는 김 선생을 불러낸다 서석대나 바람머리 재가 좋아서가 아니라 촘촘한 이파리들이 하늘 가리개로 부드러운 햇빛과 바람을 여과시켜 주는 그늘이 좋은 것이다 이쯤에서 서로가 땀을 닦아주고 반반쯤은 해묵은 김치 같은 정을 나누어 줄 수 있어 좋은 것이다 그늘과 끈―살아가면서 어린 날 소고삐를 바투 잡듯이 놓지 않는 일은 얼마나 덧정나는 일인가. 어이, 어따마시 내일은 주말인데 송풍정(松風亭) 보리밥 한 술 어떤가? 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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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 메밀꽃밭시(詩)/송수권 2015. 7. 1. 07:46
내 마음 지쳐 시들 때 호젓이 찾아가는 메밀꽃밭 슴슴한 눈물도 씻어 내리고 달빛 요염한 정령들이 더운 피의 심장도 말갛게 씻어 준다 그냥 형체도 모양도 없이 산비탈에 엎질러져서 둥둥 떠내려오는 소금밭 아리도록 저린 향내 먼 산 처마끝 등불도 쇠소리를 내며 흐르는 소리 한밤내 메밀꽃밭가에 가슴은 얼어 표주박이 되고 더운 피의 심장이 흰 소금을 쓰고 영하 몇 십도의 표주박을 따라가다 무슨 짐승처럼 엎드렸다 밤새도록 아리고 저린 내 가슴은 빈 물동이 시린 향내로만 찬물 가득 긷는다 찬물동이 이고 눈물도 웃음도 굳어서 돌아온다 (그림 : 이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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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 내빌눈시(詩)/송수권 2015. 7. 1. 07:45
동지팥죽을 쑤어먹고 나면 상(床)머리에서 아버지 늘 말씀했다 내일 모래 글피가 내빌눈이 오는 날이구나, 씨릉씨릉 싸락눈이 재게 휘뿌릴 때도 있었지만 그날은 새벽부터 정말 내빌눈이 왔다 아침부터 눈 발자국을 파며 아버지는 솜바지 저고리 남바위에다 흰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고 나는 쥐뿔벙거지인 난이에 털목도리를 뒤집어 쓰고 진외갓집 진할머니 진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진외갓집은 아침부터 내빌잔치를 하느라 들썩거렸다. 재재당숙모 어린 쪼막손이들까지 나와서 눈을 치느라 부산했고 진외숙모와 재재당숙모는 디딜방앗간에서 풀맷돌에 물켜진 날콩을 갈고 있었다 진외삼촌이 바닷가 염전 구덕에서 길어온 간수를 치기 전, 가마솥에서는 콩물이 끓어 넘쳐 또 비린내가 진동했다 나도 쪼막손이들 틈에 끼어 눈을 치웠는데 진할머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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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 월포 매생이시(詩)/송수권 2015. 7. 1. 07:45
월포엔 가지마라 입천장 델라! 월포 농악만큼 오래된 매생이 마을 뻘이 피워낸 뻘꽃 겨울바람 속에서 월포 아낙들 매생이 따는 손들이 바쁘다 월포엔 가지마라 딸 구박한 맏사위 상에만 오른다는 매생이 탕 첫 숟갈에 입천장만 경치고 줄행랑친 맏사위 그것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은근슬쩍 귓속말로만 건네주는 유가풍(儒家風)의 음식 월포엔 가지마라 입천장 떨어질라! 월포 : 전남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농업을 주업으로 삼고 있으며 어업에 종사하는 집도 있다. 월포 농악 : 지방무형문화재 제27호 임진왜란 당시 군영의 사기를 돋우기 위한 승전악에서 유래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확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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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 갈목비5시(詩)/송수권 2015. 6. 30. 14:34
다 늦은 오후 학교가 파하면 갈밭 언덕길 방죽 밑 모래밭엔 아이들이 한 둘씩 모여 들었다 우럭조개나 모시조개를 캐다가 알불에 구웠다 몇 아이들은 갈밭사이길 십리 뻘강을 건너 바다와 산이 맞닿은 곳, 산기슭 망바위에 올라 숭어떼가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는 오래도록 전해온 마을의 내력이었다 들물이 가득 뻘강을 들어 올린다 석양에 금빛 숭어가 튄다 망바위 갈잎피리 소리 자지러진다 윗옷을 벗은 아이들이 옷을 흔든다 물목이 좁은 뻘강에는 오래된 폐선 한척 아이들은 그 폐선으로 올라가 가로막이 그물을 쳤다 숭어떼가 그물을 뛰어넘다 후다닥 뱃전으로 떨어진다 아이들은 당구리로 재빨리 능금꽃숭어를 두들겨팼다. 갈대 알구지 숭어뀀을 들고 다 저녁 때가 되어 사립을 들어서면 아버지는 포름한 갈목비를 엮다말고 앞강에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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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 갈목비3시(詩)/송수권 2015. 6. 30. 14:32
또 들물이 와서 뻘강을 들었다 놓는다 어른들은 집에서 5일 장내기로 갈목비를 엮는 동안 우리들은 강변으로 나가 갈목을 꺾어다 새끼줄에 줄줄이 매달았다 밤이 오고 뻘뚝게 사냥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횃불을 들어 뻘강에 갈목줄을 늘이고 야행성 뻘뚝게가 조랑조랑 올라붙도록 횃불을 흔들며 강둑을 달렸다 틈새를 빠져나온 순이와 나는 갈밭 사잇길로 숨어들어 청갈잎을 깔고 누워 별 하나 꽁꽁 별 둘 꽁꽁 ...... 풋대추 같은 그 많은 별들을 딴 적이 있었다 별똥별 하나가 갈밭을 스쳐 바다쪽으로 날아가자 화들짝 놀란 그녀 얼굴에 눈물 몇 방울이 어릉지는 것을 보았다 와, 와, 와 뻘뚝게다 ! 휏불을 든 아이들이 갈목줄을 들어올리는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도 재빨리 뻘강으로 달려나간 것인데 정말, 갈목마다 뻘뚝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