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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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 생명시(詩)/김남조 2020. 12. 15. 10:17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 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 온다 겨울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 날의 섭리에 불려 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 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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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 무명 영령은 말한다시(詩)/김남조 2018. 6. 6. 11:00
나는 가고 싶던 곳 내쳐 못 가고 예 와서 쓸쓸히 누웠느니라 나는 하고 싶던 말 못내 말하고 기막힌 벙어리로 누웠느니라 포성이 하늘을 뚫는 싸움터 물밀 듯 밀고 밀어 원수를 쫓던 나날 내 나라와 내 겨레를 지켜야 한다는 뜨거운 마음 하나 솟구치는 불더미와 다를 바 없어도 칡넝쿨에 휘어 덮인 산골 우물 모양 속 깊이 맑고 맑게 개피던 생각 오가는 총탄 속에서도 잊을 길 없어 눈 아프게 삼삼히 보고 싶던 얼굴 그 사랑도 나는 두고 예 와서 검은 흙에 묻혔느니라 천지를 쪼개놓듯 치열한 전투에 빗발치듯 오가는 백 천의 포탄 그 하나가 내 가슴을 쏘아 피 흘리던 날 마구 내뿜는 선지피 흥건히 풀에 물들고 못 박히듯 내 생명 그 곳에 멎을 때 서럽디 섧게 감기는 눈자위는 한 줄기 하얀 눈물 흘렀느니라 내가 죽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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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 미운 마음의 시(詩)시(詩)/김남조 2017. 12. 4. 15:52
너로 하여 소망을 품은 적 없으니 너로 하여 낙망할 까닭이 없다고 다짐하고 나에게 기쁨을 준 일 없기에 내가 눈물을 살 라 없다고 믿어얄 텐데 길지 않은 인생에서 무궁한 슬픔 어인 탓인가 지내 온 날 갖가지 오뇌가 엷은 유리를 비쳐 보듯 보이는 밝은 눈의 나이에 이르렀는가 나는 추운 마음으로 홀로 예까지 밀려와 있음이려니 그릇을 비워 그득히 새것으로 채우듯 부스러진 꿈의 조각들을 모으면 생명의 바구니에 담아 들고 다시 가야할 텐데 미운 마음의 나무를 심어 준 너를 비껴 서서 미운 마음의 죄를 피하여 멀리 어디론가 떠나야할 텐데 짐짓 나 떠나야할 텐데 (그림 : 최정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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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 시계시(詩)/김남조 2017. 6. 18. 08:48
그대의 나이 90이라고 시계가 말한다 알고 있어, 내가 대답한다 그대는 90살이 되었어 시계가 또 한 번 말한다 알고 있다니까, 내가 다시 대답한다 시계가 나에게 묻는다 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내가 대답한다 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 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 그러나 잠시 후 나의 대답을 수정한다 사랑과 재물과 오래 사는 일이라고 시계는 즐겁게 한판 웃었다 그럴 테지 그럴 테지 그대는 속물 중의 속물이니 그쯤이 정답일 테지…… 시계는 쉬지 않고 저만치 가 있었다 (그림 : 이석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