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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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 겨울 애상시(詩)/김남조 2013. 11. 19. 18:56
올해 유달리 폭설과 얼음에 뒤덮인 겨울 그래 따뜻해지려고 저마다 기억해 내는 가슴 하나 난파한 바다에서도 가시처럼 못 삼킬 이름 하나 나는 육십 평생을 뭘하며 살았나 내게 와 쉬려고 혹은 영 눈감으려고 먼 세월 되짚어 찾아오는 옛사랑 하나 없으니 죄스러워라 눈과 얼음 덮인 흙의 살결에도 초록액체의 새순들 자랄 것이어늘 사람 한 평생을 허락받아 살면서 어쩌자고 참사랑 하나조차 못 가꾸어 겨울 지나도록 이렇게 혼자 봄이 와도 다시 그 후에도 나는 혼자일 것인가 (그림 : 정인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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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 연가시(詩)/김남조 2013. 11. 19. 18:55
잠든 솔숲에 머문 달빛처럼이나 슬픔이 갈앉아 평화론 미소되게 하소서 깍아 세운 돌기둥에 비스듬히 기운 연지빛 노을의 그와 같은 그리움일지라도 오히려 말 없는 당신과 나의 사랑이게 하소서 본시 슬픔과 간난은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짙푸른 수심일수록 더욱 연연히 붉은 산호의 마음을 꽃밭처럼 가꾸게 하소서 눈물과 말을 가져 내 마음을 당신께 알리려던 때는 아직도 그리움이 덜했었다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저 돌과 같은 침묵만이 나의 전부이오니 잊음과 단잠 속에 홀로 감미로운 묘지의 큰 나무를 닮아 앞으론 묵도와 축원에 넘쳐 깊이 속으로만 넘쳐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이여 (그림 : 김복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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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시(詩)/김남조 2013. 11. 19. 18:53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누구든이 아니라 마음이 통하고 눈길이 통하고 언어가 통하는 사람과 잠시만이라도 같이 있고 싶습니다 살아감이 괴로울 때는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힘이 생깁니다 살아감이 지루할 때면 보고픈 사람이 있으면 용기가 생깁니다 그리도 사람은 많은데 모두 다 바라보면 멋쩍은 모습으로 떠나가고 때론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외면합니다. 사람이 만나고 싶습니다 친구라고 불러도 좋고 사랑하는 이라고 불러도 좋을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림 : 김영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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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 너에게시(詩)/김남조 2013. 11. 19. 18:52
아슴한 어느 옛날 겁(劫)을 달리하는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알뜰한 내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아비의 피 묻은 늑골에서 백년해로의 지어미를 빚으셨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옛 사연이나 아니었을까 풋풋하고 건강한 원시의 숲 찬연한 원색의 칠범벅이 속에서 아침 햇살마냥 피어나던 우리들 사랑이나 아니었을까 불러 불러도 아쉬움은 남느니 나날이 새로 샘솟는 그리움이랴, 이는 그날의 마음 그대로인지 모른다 빈방 차가운 창가에 지금이사 너 없이 살아가는 나이건만 아슴한 어느 훗날에 가물거리는 보랏빛 기류같이 곱고 먼 시간 속에서 어쩌면 넌 다시금 남김없는 내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림 : 한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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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 얼음 이야기시(詩)/김남조 2013. 11. 19. 18:51
서양의 사랑은 활활 불타서 재를 남기고 동양의 사랑은 서로 스치며 녹아 물이 되어 하나에 이른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남, 북극의 만년설은 깜짝 놀라는 선연한 청옥빛인 걸 조금 부수어 팔기도 하는데 이를 수입한 나라들에선 작게 썰어 칵테일잔에 띄운다 한다 보통 얼음보다 네 배를 더디 녹으며 수정주사위 같고 신기하여 사람들은 술도 잊은 채 지켜본다던가 광석이면서 본질은 물이라 차갑고 투명한 물의 곤충들이 빽빽이 붐비며 꿈틀대고 실오리만한 균열에도 몸을 푸는 물방울들이 작은 운하처럼 운집하리라 소리없이 움직이는 공장 같으리 두 얼음 세 얼음이 스치고 녹아 물이 되어 끝내 하나에 이르듯 우리도 그리 된다면 좋을 것을 .... 사람아 (그림 : 김영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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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 가난한 이름에게시(詩)/김남조 2013. 11. 19. 18:50
이 넓은 세상에서 한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여인을 만나지 못해 당신도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까 검은 벽의 검은 꽃 그림자 같은 어두운 향료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겨울 밤 고독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때문에 어딘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때문에 때로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라는 가난한 이름에 고독도 과해서 못가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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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 다시금 봄날에시(詩)/김남조 2013. 11. 19. 18:49
가랑잎 나의 영혼아 만국(晩菊) 한 송이 물오리처럼 목이 시린 조락의 뜰에 너 함께나도 볼이 젖는다 그 전날 그 푸른 산바람 해설픈 초원에 떠놀던 여른여른 눈여린 고운 불수레 하며 멀리 메아리져서 돌아들 오던 그리운 노래 그리운 이름 펴며 겹치며 드높이 손짓하는 송이 송이 탐스런 떼구름들 네가 그들을 얼마나 가슴 바쳐 사랑했음인가를 내가 안다 지금은 땅에 떨어져 매운 돌부리에 찢기우는 너여 가랑비 보슬보슬 내림과 같고 소물소물 살눈썹이 웃음과 같은 네 달가운 모든것 오직 그들 호사스런 계절의 풍요한 아름다움 앞에 바친 푸른 찬가 헌신이던걸 내가 안다 그러나 지금은 가야지 지금은 누감고 고이 가야지 지열이 돌아오는 어느 봄날에 다시금 어린아이처럼 손 흔들며 깨어나리라 찬서리 소리도 없이 내리는 뜰에 핏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