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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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 빗물같은 정을 주리라시(詩)/김남조 2013. 11. 19. 18:47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 줌 뿌리면 솜털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 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 것도 무상(無償)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그림 : 박혜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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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 밤 편지시(詩)/김남조 2013. 11. 19. 18:46
편지를 쓰게 해다오. 이날의 할말을 마치고 늙도록 거르지 않는 독백의 연습도 마친 다음 날마다 한 구절씩 깊은 밤에 편지를 쓰게 해다오. 밤 기도에 이슬 내리는 적멸을 촛불빛에 풀리는 나직히 습한 악곡(樂曲)들을 겨울 침상(枕上)에 적시이게 해다오 새벽을 낳으면서 죽어가는 밤들을 가슴 저려 가슴 저려 사랑하게 해다오. 세월이 깊을수록 삶의 달갑고 절실함도 더해 젊어선 가슴으로 소리내고 이 시절 골수에서 말하게 되는 걸 고쳐 못쓸 유언처럼 기록하게 해다오 날마다 사랑함은 날마다 죽는 일임을 이 또한 적어두게 해다오. 눈 오는 날엔 눈발에 섞여 바람 부는 날엔 바람결에 실려 땅 끝까지 돌아서 오는 영혼의 밤외출도 후련히 털어놓게 해다오. 어느 날 밤은 나의 편지도 끝날이 되겠거니 가장 먼 별 하나의 빛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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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 사랑의 말시(詩)/김남조 2013. 11. 19. 18:45
1 사랑은 말 하지 않는 말 아침에 단잠을 깨우듯 눈부셔 못견딘 사랑 하나 입술 없는 영혼 안에 집을 지어 대문 중문 다 지나는 맨 뒷방 병풍 너메 숨어사네 옛 동양의 조각달과 금빛 수실 두르는 별들처럼 생각만이 깊고 말 하지 않는 말 사랑 하나 2 사랑을 말한 탓에 천지간 불붙어 버리고 그 벌이 시키는대로 세상 양끝이 나뉘었었네 한평생 다 저물어 하직삼아 만났더니 아아 천만번 쏟아 붓고도 진홍인 노을 사랑은 말해버린 잘못조차 아름답구나 (그림 : 한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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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 6월의 시시(詩)/김남조 2013. 11. 19. 18:44
어쩌면 미소짓는 물여울처럼 부는 바람일까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언저리에 고마운 햇빛은 기름인양 하고 깊은 화평의 숨 쉬면서 저만치 트인 청청한 하늘이 성그런 물줄기 되어 마음에 빗발쳐 온다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또 보리밭은 미움이 서로 없는 사랑의 고을이라 바람도 미소하며 부는 것일까 잔 물결 큰 물결의 출렁이는 바닷가도 싶고 은 물결 금 물결의 강물인가도 싶어 보리가 익어가는 푸른 밭 밭머리에서 유월과 바람과 풋보리의 시를 쓰자 맑고 푸르른 노래를 적자 (그림 : 박준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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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 5월의 연가시(詩)/김남조 2013. 11. 19. 18:43
눈길 주는 곳 모두 윤이 흐르고 여른여른 햇무리 같은 빛이 이는 건 그대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버려진 듯 홀로인 사양(斜陽)의 창가에서 얼굴을 싸안고 눈물을 견디는 마음은 그대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발돋움하며 자라온 나무들 땅에 드리운 그 눅진 그림자까지 초록빛 속속들이 잦아든 5월 바람은 바람을 손짓해 바람끼리 모여 사는 바람들의 이웃처럼 홀로인 마음 외로움일래 부르고 이에 대답하며 나섰거든 여기 뜨거운 가슴을 풀자 외딴 곳 짙은 물빛으로 성그러이 솟아 넘치건만도 종내 보이지 않는 밤의 옹달샘같이 감청(紺靑)의 물빛 감추고 이처럼 섧게 불타고 있음은 내가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그림 : 이영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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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 사랑한 이야기시(詩)/김남조 2013. 11. 16. 20:41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해 저문 들녘에서 겨웁도록 마음 바친 소녀의 원이라고 구김없는 물 위에 차겁도록 흰 이맛전 먼저 살며시 떠오르는 무구한 소녀라 무슨 원이 행여 죄 되리까 만은 사랑한 이야기야 허구헌날 사무쳐도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글썽이며 목이 메도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가만가만 뇌어볼 이름임을 소녀는 아직어려 세상을 몰라 사랑한 이야기를 하랍니다 꽃이 지는 봄밤에랴 희어서 설운 꽃잎 잎새마다 보챈다고 가이없는 눈벌에 한송이 핏빛 동백 불본 모양 몸이 덥 듯 귀여운 소녀라 무슨 원이 굳이 아껴우리만 사랑한 이야기야 내 마음 저며낼까 못내 말하고 사랑한 이야기야 내 영혼 피 흐를까 못내 말하고 죽을 때나 눈매 곱게 그려 볼 모습임을 소녀는 아직 어려 세상을 몰라 기막힌 이 이야기를 하랍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