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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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림 - 소금창고가 있는 풍경시(詩)/이가림 2019. 8. 21. 09:23
소래포구 어디엔가 묻혀 있을 추억의 사금파리 한 조각이라도 우연히 캐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속셈을 슬그머니 감춘 채 몇 컷의 흑백풍경을 훔치러 갔다 가을은 서둘러 떠나버리고 미처 겨울은 당도하지 않은 서늘한 계절의 어중간 버젓이 갯벌 생태공원으로 둔갑해 있는 옛날 소금밭에 들어서자 찰칵, 찰칵, 찰칵, 사정없이 풍경을 자르는 재단사의 가위질 소리에 빼빼 마른 나문재들이 어리둥절 몸을 웅크렸다 시커면 버팀목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소금창고와 버려진 장난감 놀이기구 같은 수차(水車)가 시들어가는 홍시빛 노을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뿐 마른 뻘밭에 엎드린 나문재들의 흐느낌 소리를 여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소금창고가 있는 풍경을 베끼러 갔다가 오히려 풍경의 틀에 끼워져 한 포기 나문재로 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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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림 - 귀가, 내 가장 먼 여행 2시(詩)/이가림 2019. 8. 21. 09:22
이렇게 저렇게 저렇게 이렇게 육십년도 더 넘게 끌고 온 꿰매고 기운 헝겊 투성이의 내 슬픈 부대자루를 해지는 고갯마루에 잠시 부려놓고 하늘에 밑줄 친 듯 그어진 운평선(雲平線)에 망연히 한눈팔고 있노라니 예전에 어디선가 본 듯한 허연 수염 휘날리는 조각구름 하나가 불현듯 다가와 축 처진 내 어깨를 두드리며 타이르네 “그 동안 많이도 수고했네만 네 부대자루가 넝마가 될 때까지 조금만 더 끌고 가보게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천길 낭떠러지 그 미완성의 정점(頂点) 끝에 다다를 것이니 그 때 푸른 심연의 바다 한 가운데 서슴없이 뛰어내리게” 이렇게 저렇게 저렇게 이렇게 육십년도 더 넘게 끌고 온 꿰매고 기운 헝겊 투성이의 내 슬픈 부대자루, 다 닳아진 한 조각 걸레가 되기까지 해 떨어지기 전 생의 마루바닥을 무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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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림 - 풀잎 가족시(詩)/이가림 2019. 8. 21. 09:08
느닷없이 바람이 세게 불어오면 애비 풀잎은 휘어진 허리를 곧추세워 "얘들아, 잠깐만 엎드려라 얘들아, 잠깐만 엎드려라"고 고래고래 고함치다가 뿌리를 허옇게 드러내면서 쓰러진다. 하지만 애비 풀잎이 뒤집힌 뿌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자 풀잎 가족은 일제히 어깨동무를 한다. 비 오는 날이면 새끼 풀잎들은 모두 벌판으로 몰려 나가 얼굴 때리는 물방울이 좋아 하늘을 향해 깡총깡총 튀어 오른다. 그 어린 것들 옆에서 애비 풀잎도 애미 풀잎도 덩달아 어깨춤을 춘다. 새끼들 중 누가 몸살이라도 나면 함께 끙끙 앓으며 밤새 뜬눈으로 밤을 세운다. 푸른 여름밤 별의 눈동자 초롱초롱 빛날 때면 풀잎 가족의 눈가에도 방울 방울 방울 투명한 이슬이 돋아 새벽까지 은하수 같은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는다. (그림 : 신미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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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림 - 깨어진 거울시(詩)/이가림 2015. 5. 30. 09:55
고 가시내 있었잔여 왜 쬐끔 오드리 햅번같이 생겼다고 해서 우리가 꽁무니 뒤쫓아댕기며 무던히도 꼬실라고 해쌓던 고 불여우 말여 그 무렵 국어시간에 김해강 선생한테서 우리가 막 가시리를 배울 때였응개 그걸 뽄따가지고 ‘꼬시리 꼬시리잇고, 불여우 꼬시리잇고 날러는 어디살라하고, 바리고 꼬셔지잇고’ 어쩌고 서로 다투어 장난치게 만든 최명숙이 기억나지 근디 고 가시내를 요전날 서울 올라갔다가 광화문 지하도 네거리에서 참말로 우연히 십 몇년만에 만난거야 첨에는 잘 몰라보것더라고 워낙 세월이 지나다본개로 주름살도 꽤 많이 생기고 그래서 말여 좌우당간 오랜만에 만났응개로 차나 한잔 하자고해서 그 근처 제일 가까운 찻집으로 일단 갔지 근디 얘기를 나누다본개로 고 가시내의 인생 연속극을 대강 알게 된 거여 해병대 대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