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임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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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윤 - 마음 한 채시(詩)/임동윤 2020. 3. 14. 10:01
그 겨울 네 얼굴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봄이 오기까지 녹지 않는 눈 더미에 갇혀서 나는 벌써 그리움이라는 말을 잊었는가 돌다리도 지워지고 앞개울도 몸을 바꿔 흘러야만 하는 눈 시린 오늘, 말하자면 나는 너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하였구나 내 짧은 생각으로는 나를 기억하리라 생각했는데 이 마을, 이 집, 이 마당에서도 여전히 네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는 너를 제대로 껴안지 못했나보다 서로가 서로 사이에 높다란 벽 하나 세워놓고 문은 꽁꽁 닫아놓고 다만 그리워한 것일 뿐, 그래서 눈 내리는 이 길목에서 손 움켜잡았던 그 불같은 마음도 어쩌면 불이 아니었구나 돌아서면 저만치서 바라다볼 뿐, 서로가 서로에게 멀어지는 법만 익혔나보다 그러니까 지금도 한 사나흘 눈만 내리는구나 이 겨울 내내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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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윤 - 늦은 밤 편지 2시(詩)/임동윤 2020. 3. 14. 09:48
자정 무렵, 골목길을 오른다 젖은 빨래처럼 끈적거리는 어둠이 덕지덕지 대문간에 붙어있다 까만 구름이 하늘을 모두 먹어 치워버렸다 서서히 제 몸을 불리고 있다 바람도 한껏 불어와 가랑잎 한 무더기 떨어뜨리고 길바닥 휩쓸다가 휙휙 허공으로 몸 날려 보낸다 어둡다, 와르릉 쾅쾅 먹구름이 소나기를 뿌려댄다 빗줄기는 두려움도 없이 쏟아진다 서류가방으로 막아보지만 흐린 외등 아래로 줄줄 흘러내리는 밤은 눅눅하다 반투명이다, 흐리게 굴절되는 시야 속으로 키 낮은 집들이 축축 늘어진다 비를 피해 대문간으로 달려가는 가장들, 어깨마다 어둠이 하얗게 달라붙어 있다 (그림 : 이동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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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윤 - 소리가 불을 켠다시(詩)/임동윤 2020. 3. 14. 09:41
말랑말랑 서리 맞은 감들이 추운 허공에 불을 매달고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인데 가끔 바닥으로 몸을 던지기도 한다 철퍼덕, 철퍼덕 떨어지는 소리로 나무 밑이 환하다 손닿을 수 없이 높은, 장대로도 따 내릴 수 없는 저 아득한 거리에 날짐승들을 위해 하느님이 매달아 놓은 겨울양식 작고 연약한 벌레들을 위하여 철퍼덕 떨어뜨려주시기도 하고 추운 허공의 새들을 위하여 하늘 한 귀퉁이 비워놓으시기도 한다 서로 등 돌리고 사는 땅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넉넉한 저 오래된 나무 가지 아래, 떨어지는 소리가 주홍 불을 켠다 (그림 : 안창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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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윤 - 사람이 그리운 날 1시(詩)/임동윤 2020. 3. 14. 09:37
햇살 맑은 툇마루에 앉아 외갓집 지붕의 흰 그늘을 바라본다 희디흰 그늘이 뒤덮은 지붕은 구름속이다 잡힐 듯 나지막한 허공이다 그 하늘로 참새들이 날갯짓을 하고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배추흰나비도 나풀거릴 것 같은 이따금 산비둘기 울음도 날아와 앉는다 저 흰 물결, 어디서 온 걸까 할머니가 심은 벽오동나무 그늘일까 온통 흰 그늘로 지붕을 덮은 목련 한 그루 헐벗은 누더기를 벗겨내듯 환하게, 봄 한철 견디고 있다 이쪽 강물을 풀어 저쪽 지붕까지 마치 명주실을 펼쳐놓듯이 (그림 : 이형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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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윤 - 스파이드맨시(詩)/임동윤 2019. 2. 24. 11:57
그는 빌딩에 붙어산다, 가느다란 거미줄에 체중을 묶고 여전히 30층 유리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중이다 종일 길거리를 쏘다녔으나 아무 것도 얻지 못한 눈물들이 그렁그렁 얼룩진 벽을, 부릉부릉 전속력으로 질주하지만 늘 목적지를 벗어나는 울분이 덕지덕지 말라붙은 벽을, 윈덱스 세제로 박박 밀어낸다, 물과 세제는 2대 1 너무 묽어서는 아무 것도 지울 수 없다 창문에 낀 마음들을 닦고 문지르지만 지워지지 않는다 세상사는 이치도 이런 것이 아닐까, 등줄기가 흠뻑 젖는다 잠시 허리를 펴고 유리창 안의 세계를 훔쳐본다 자판을 두들기고, 원탁에 앉아 회의를 하고, 하나같이 제 자리에 착실히 붙어 부지런히 손과 몸을 움직인다 벌집 같은 빌딩 속에서 제 몫의 거미줄을 치고 있는 사람들 저 무리 속에 그가 끼어있던 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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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윤 - 괭이부리마을시(詩)/임동윤 2018. 8. 14. 15:30
낮은 지붕들이 구름을 잡고 소꿉놀이를 한다 중심을 향해 달려가는 것들은 줄행랑을 치고 따뜻한 숨결 하나 느껴지지 않는 대낮이 낡은 전신주에 기대 펄럭펄럭 바람을 탄다 가난은 이곳의 흔한 전리품이어서 구겨진 방에서 그늘은 제 부피를 늘이고 골목을 할퀴는 밤 고양이족들처럼 이곳 사람들은 씹다 뱉어낸 단맛 잃은 껌이다 시도 때도 없이 나뭇잎으로 뚝뚝 떨어진다 가진 것이 없어 훔칠 것도 없는 동네 그래서 골목이 마당이고 방이다 빨랫줄에 걸려서 펄럭거리는 옷들 저 속에 흔들리는 한 시절이 들어있을 것이다 젖은 몸들이 달빛 풀어 씻겨갈 때쯤 전신주에 걸린 구인광고전단은 낡아만 간다 제 길을 찾아 하늘 오르는 저 나무들 방법의 나무들이 스스로 나이테를 쟁이듯이 오랜 상처를 푸성귀로 채우는 아침 한 때 어디로 밥벌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