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임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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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윤 - 다시, 늦은 봄 편지시(詩)/임동윤 2018. 6. 7. 12:02
너 앉았다 떠난 자리에 아직 꽃 한 송이 피어나지 않는다 이 봄 오래오래 아침을 기다렸는데 벌써 기다리는 일의 소중함을 잊었는가 개나리 목련도 가고 연분홍 벚꽃도 후르르 진다 지금은 다만 보랏빛 향기 무성한 라일락 그늘 밑이다 마지막 남은 봄을 너 없이도 나는 보낸다 바람은 어제보다 거칠고 네가 이름 붙여준 나무들은 새순 하나 없다 저 고요를 한 겹씩 벗겨내면 연둣빛이 돌까, 잎이 돋을까 도무지 얼굴 하나 지워지지 않는다 벽 하나 허물지 못하고 문만 꽁꽁 닫아놓고 서로 안다고, 안다고 말했을 뿐 다만 멀리서 가깝게만 보고 있구나 너 앉았다가 떠난 자리인데도 아직 꽃 한 송이 피어나지 않는다 벌써 나는, 기다리는 일의 소중함을 잊었는가 (그림 : 이현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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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윤 - 마음그늘시(詩)/임동윤 2018. 6. 2. 22:13
마음엔 늘 나 아닌 그 사내가 살고 있다 내 마음의 행로를 따라 제대로 걷지 못하게 한 그와 이처럼 오래 동거해왔다니, 단칼에 그를 뿌리칠 수 있는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 조금씩 재치와 부끄러움과 체면을 알면서 내 얼굴은 철판처럼 두꺼워지고 가면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와 나 사이엔 단단한 끈이 있어 세 치 짧은 혀로 마음에도 없는 말로 살아왔을 뿐 그리하여 상처투성이 그늘만 남았을 뿐 아직 강물처럼 흐르지 못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로 허구의 강을 허우적거리는 간사한 내 세치의 혀, 그 혀가 건너는 흐린 세상 이 몹쓸 놈의 혀를 단칼에 잘라낼 수는 없을까 밤새 담금질로 눈먼 혀를 두드려볼 뿐 너무 오래 늪지를 걸어온 발이 습관처럼 올라가는 우리 가파른 삶이 출렁거리는 바다 굵은 소금으로 내 세 치 혀를 염장해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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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윤 - 늦은 밤 편지.3시(詩)/임동윤 2017. 4. 16. 09:48
누구를 떠나보낸 사람은 안다 눈물 흘리는 일이 모처럼 따뜻해진다는 것을 그대 앉았던 의자는 헐거워졌지만 언젠가 돌아가야 할 위치에서 어둠은 깊어서 별로 뜨고 그대 저 별이었다가 잊힐 수 없는 얼굴이었다가 사방에서 문 닫히는 소리 가득하지만 단풍잎같이 작은 사랑아, 먼저 떠난 그대를 기다리는 밤 마침내 허공을 휘젓는 새가 된다 아주 멀리 있지만 아주 멀리 있지 않는 것처럼 이 허전한 자리가 허전하지 않다는 것처럼, 나는 안다 떠나보내야 할 계절과 만나야 할 계절이 또 하나의 통로라는 것을 밤하늘 아득히 별로 떠서 내려다보는 눈빛 그 황홀, 누군가를 떠나보낸 사람은 안다 서로 빛의 속도로 달려가고 있음을 (그림 : 박용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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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윤 - 따뜻한 바깥시(詩)/임동윤 2014. 10. 25. 18:50
하늘과 땅의 경계가 어두워졌지만 미명 같은 물빛이 남아있다, 감추지 못하는 꼬리 때문이다 좀처럼 어두워지지 않는 저녁을 나는 품에 안았다 눈발은 안팎의 경계를 지워버리고 징검다리를 지우고 마을로 가는 모든 길을 무너뜨렸다 새들도 제 둥지 찾아 돌아간 지 이미 오래다 어두울 시간인데도 좀처럼 어두워지지 않고 번지는 저 물살엔 형형한 그리움이 묻어있다 서서히 저무는 풍경이란 젖은 마음들을 일으켜 세우는 법 전나무가 제 팔 부러뜨리는 소리를 내질렀는지도 모른다 그 겨울밤, 너를 돌려세운 것도 눈보라였던가 움켜쥘 수 없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던가 돌아보면 빈들처럼 쓸쓸하지만 그래도 희미한 물살은 남아있다 바람이 추녀 끝을 빠르게 흔들고 가고 깊어지는 눈발 사이, 컹컹 승냥이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이대로 흰 봉분 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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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윤 - 엄마의 겨울시(詩)/임동윤 2014. 4. 24. 11:22
토담집 추녀까지 눈에 묻히면 그 겨울의 울진행은 너무 멀었네 여섯자 세치 눈구렁 속 우물길 찾던 아지매들 쿨룩쿨룩 잠들고 뜨겁게 아궁이에 군불 지피며 쌍전리의 겨울은 깊어만 갔네 등잔불 꼴깍 졸아드는 흙집에서 무르팍 훌렁 그대로 드러낸 채 삼베실 잘게 비며 길쌈을 할 때 발이 달린 소문은 더욱 큰 바람의 손으로 자라나고 아침마다 뼈만 남은 가시가 되어 마당 한가운데 허옇게 드러누웠지 삼베실 자아 올을 짜올리는 일이 이 겨울 유일한 쾌락인듯 부르튼 무르팍 함박눈으로 싸매면 옥양목 저고리 앞섶마다 눈물 얼어 떨어지는 싸락눈 소리 미쳐 다하지 못한 말들 뜨거운 신열로 다스리네 딸각 딸각 연둣빛 직조로 봄이 오고 있네 대설경보 속 막차는 끝내 오지 않고 텅텅 빈 가슴 눈물 골짜기 밤새도록 속절없이 싸락눈만 쌓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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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윤 - 하지시(詩)/임동윤 2014. 4. 24. 11:18
어머니 눈물져 떠나온 고향집에선 이 여름도 봉숭아가 주머니를 부풀립니다. 간장 항아리 놓였던 자리에 잡초 무성한 마당귀 우물가에 화르르, 화르르 석류처럼 꼬투리를 터뜨립니다. 인적 끊긴 집 둘레로 고추잠자리만 비행할 뿐, 먼지 낀 헛간에는 녹스는 농기구들. 허물어진 돌담을 끼고 해바라기만 줄지어 서 있고 그 무표정한 그늘을 딛고 토실토실 물이 오른 봉숭아 몇 그루, 듬성듬성 버짐이 핀 기와집 처마 밑에 해마다 둥지 트는 제비와 놀며 흰색 분홍색으로 여름을 부지런히 피워올립니다. 그런 날, 어머님 손톱에도 문득 바알간 꽃물이 돕니다. (그림 : 안정애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