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박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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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슬픔은 혀가 없다시(詩)/박지웅 2022. 7. 15. 20:41
슬픔이 왜 말이 없나 보니 혀가 없다 그는 지금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가 살아온 방식에 대한 예민한 기록 혹은 지극히 외로운 해명 그는 누구인가 아니 그는 누구였을까 본디 그는 없는 듯이 살아왔다 기쁨과 배다른 형제로 태어나 멸시받으며 살았다 평소 온순한 뱀으로 조용히 기어 다니지만 내 마음이 떠나가, 따위 말에 한순간 아가리 벌려 꽃을 삼켜버리기도 했다 말했듯, 슬픔은 혀가 없다 실은 두 갈래로 갈라진 찢긴 마음뿐이다 손수건 같은 곳에 조용히 숨어 지낼 뿐이다 득달같이 달려와 환심을 사려는 가벼운 기쁨에 비할 수 있을까, 또 큰 기쁨은 구덩이를 깊이 파는 법 본디 그는 손만 잡아주어도 마음을 빼앗기는 정결하고 유순한 처자였다 기쁨이 손 내밀자 순진하게 따라나섰다가 몸을 빼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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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찬밥시(詩)/박지웅 2021. 10. 16. 12:16
나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엄마라는 가엾은 풍습을 아네 나를 낳은 뒤 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여인 오늘은 목단 이불을 귓불까지 쓸어올리고 잠든 섣달 흰머리 쓸다 설워진 이야기도 어느덧 늙어 안을수록 흘러가는 당신에게 깃들던 아득한 열 달 새끼와 입맛 맞추느라 입덧하고 살과 뼈를 밀어올려 내 보금자리 마련한 날들 몸속에 불을 놓아 심장을 짓고 몸 안에 기러기 풀어 피붙이 눈을 띄우던 한때 당신은 네 개의 무릎을 가진 건강한 짐승이었네 눈 내리는 섣달 밤바다와 한 이불 쓰고 가랑이로 고래 드는 꿈을 꾸는지 스물여덟 새벽으로 돌아갔는지 이부자리에 찬밥 한 공기 남아있네 (그림 : 이미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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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목련야구단시(詩)/박지웅 2019. 8. 19. 11:02
봄은 언제나 홈런이다 담장 밖으로 넘어가니까 목련의 외야에 떨어진 하얀 공을 주워들고 팬들은 덩달아 두 팔 치켜들고 집으로 달려간다 홈런이다! 그러니 저것은 꽃이 아니다 나무에 피어난 꽃은 정말 정말, 꽃이 아니다 나무배트 바깥으로 넘어간 하얀 공이다 가끔 불운이 따랐고 실책에 이어 실점도 했지만 보아라, 봄은 전력이 막강한 팀이다 봄은 집념이 강한 팀이다 9회말 투아웃에 목련은 온다 한 번도 봄이 목련을 포기하는 것을 본 적 없다 타자 목련이 들어서면 경기는 반드시 뒤집힌다 목련은 언제나 홈런이다 (그림 : 임갑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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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국자별 창고시(詩)/박지웅 2019. 3. 5. 09:09
초음(草陰)에는 그 계절에 쓰지 않는 별들을 모아두는 창고가 있어 드문드문 빛바랜 돌벽에 홍역 앓는 어린 살결을 달인 듯 찔레가 불긋불긋 번졌다가 지나가곤 하였다 하루는 별이 붐비는 뒷마당에 섰다가 하늘에서 창고로 옮겨지는 짐들을 몰래 풀어 본 일이 있다 별 하나와 별 하나 사이마다 몇 억 광년의 검은색 별마다 품은 동서남북이 서로 깊고 멀고멀어 닿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목덜미 당기도록 그 짐 보따리에 어깨 넣고 휘이휘이 팔을 저어보았다 별로부터 나는 얼마나 오랜 뒤의 일인지 또 당신은 별에서부터 얼마나 외딴 일인지 당신의 아름다운 천체에 넣었던 팔은 돌려받지 못하고 아득히 까마득히 꿈에서 남해로 걸어 내려왔는데 그리운 것과 그리운 것 사이에서 나는 태어났고 살았고 밥을 떴고 또 가장 따스하고 쓸쓸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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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별방리 오로라시(詩)/박지웅 2018. 6. 15. 15:45
별방리 밤하늘은 비옥해 당신과 도망가 살기 좋을까 햇볕 한 톨 빗방울 하나 다 거두어 곡식으로 키우는 양지들의 저녁 당신이 글썽였다 집이라는 말은 저녁에 가장 예쁘다고 말하려다 나는 잠자코 만지던 노을을 수면에 내려놓았다 달다리봉에서 뛰어내리면 저 천체에 밀입국할 수 있을까 당신은 주전자 흔들며 정씨주막에서 막걸리를 받아 오고 나는 별들의 대장간에 취직해 물병자리를 두드리고 그러면 어떨까 삼백년 느릅나무 아래 바둑알처럼 놓였을 밤과 낮들을 그러면 어떨까 골짜기와 봉우리에 채비 마친 꽃들, 밤하늘에 돛을 드리우는 별방리에서 우리, 별방리 :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별방리 달다리봉 : 월출봉. 달이 제일 먼저 뜬다는 봉우리로 정월 보름날 마을에서 보면 산과 달이 일직선이 됨. (그림 : 김상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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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 팥죽 한 그릇시(詩)/박지웅 2017. 12. 2. 15:41
동지 저녁, 어미는 손바닥 비벼 새알을 낳았다 그것을 쇠솥에 넣고 뭉근히 팥죽을 쑤었다 나무주걱 뒤로 스르르 뱀 같은 것이 뒤따르며 새알을 물고 붉은 성간(星間) 사이로 숨어들었다 솥 안에 처마 끝과 별과 그늘이 여닫히며 익어갔다 부뚜막 뒤를 간질이며 싸락눈 사락사락 나리고 나는 어미 곁에 나긋이 새알을 혓바닥에 품고 다시 이를 수 없는 따뜻하고 사소한 밤을 염려하였지 싶다 명주실 몰래 묶어놓을 데 없을까 뒤뜰 장독간 호리병처럼 서 있는 밤하늘을 보며 먼먼 전설에 귀를 세운 것이다 바람 드는 부엌문에 서서 공중을 두리번거리다 하얀 마침표 하나 눈동자에 떨어져 그만 놓쳐버린 집 어느 동짓날 팥죽 한 그릇 받고 사소한 것을 쓰느니 대문간이며 담장이며 낮은 기와로 번지던 붉은 실핏줄들 따뜻한 여러 마리 새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