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안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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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 봄밤시(詩)/안상학 2020. 5. 5. 18:28
안동 살 땐 친한 친구가 툭하면 서울 가는 것 같더만 서울 와서 살아보니 그 친구 자주 안 오네 서울 와 살아보니 서울 친구들도 다 이해가 가네 내 안동 살 땐 어쩌다 서울 오면 술자리 시작하기 바쁘게 빠져나가던 그 친구들 그렇게 야속해보이더니만 서울 살아보니 나도 술자리 시작하기 무섭게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보네 안동 어디 사과꽃 피면 술 마시자던 그 약속 올 봄도 글렀네 사과꽃 내렸다는 소식만 날아드는 봄밤 (그림 : 김성호 화백) Gary Prim - Apple Trees In Bl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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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 북녘 거처시(詩)/안상학 2019. 11. 2. 12:59
당신은 인생길에서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까 나는 갈수만 있다면 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다만 1978년 여름 한 달 살았던 불암산 아래 상계동 종점 가짜 보석 반지를 찍어내던 프레스가 있던 작은 공장 신개발 지구 허름한 사람들의 발걸음 먼저 자리 잡고 프레스를 밟던 불알친구 비만 오면 질척이던 골목 안 그 낮은 지붕 아래 내가 살아본 이 세상 가장 먼 북녘의 거처 돌아갈 수만 있다면 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그해 여름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탄 열일곱 소년 행복과는 거리가 먼 러셀의 책 한 권 싸구려 야외전축 유행가 레코드판 몇 장 세 번째 아내를 둔 아버지가 살던 셋방을 벗어난 까까머리 전형처럼 후줄근하게 비는 내리고 청량리 앞 미주아파트 식모 살던 동생이 남몰래 끓여준 라면 한 끼 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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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 고산정 (孤山亭)시(詩)/안상학 2019. 4. 16. 17:58
강 건너 날 부르던 그대 눈부신 옷자락도 그대를 기다리던 나의 몸가짐도 구름처럼 흩어졌네 그대나 나나 짧은 웃음으로 만나 강물을 사이 두고 마음 오고 갔건만 오래 전 우리는 없고 그림자로만 남아 나는 강 이쪽에서 우두커니 낡은 집에 기대섰고 그대는 건너 저쪽 노송을 짚고 섰네 아득하여라 그대 구름으로 잠시 다녀가듯이 나 여기 한 마리 학으로 잠깐 쉬었다 가리 그대여 산이 외로운 건 이렇듯 높이 솟아 다정한 벗이 없기 때문이리 노송 저리 쓸쓸한 것은 너무 높푸르러 꽃을 가까이 할 수 없기 때문이리 고산정 (孤山亭)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447.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4호. 정유재란시 안동 수성장으로 활약하여 좌승지(左承旨)에 증직(增職)된 바 있는 성성재(惺惺齋)금난수(琴蘭秀)의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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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 여수시(詩)/안상학 2017. 5. 24. 09:28
이름만 들어도 가슴 싸한 꽃이 있듯이 남도 어디쯤 이름만 들어도 가슴 아릿한 곳이 있습니다 굳이 동백꽃을 들먹이지 않아도 역전 실내포장 어디 갓 삶아낸 홍합국물이 아니래도 다도해 어디께 이름만 들어도 어느 여인의 이름이나 들은 듯 가슴 밑뿌리까지 뻐근해지는 곳이 있습니다 세상에 해 안 뜬다 해도 그 곳만은 해바라기가 자랄 것만 같고 별과 달이 나오지 않는다 해도 그 곳만은 은빛 파도가 일렁일 것만 같은 남쪽 바다 어디 이름만 들어도 절로 마음이 가는 곳이 있습니다 천년을 사랑만 하다 죽는다는 꽃이 피고 천년을 그리워만 하다 죽는다는 새가 나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 타는 그런 곳이 있습니다 소리내어 부르기도 아까워 입만 벌렸다 오무렸다 해보는 그런 곳이 있습니다 (그림 : 임기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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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 꽃소식시(詩)/안상학 2017. 5. 11. 23:21
제주 애월 어디 가면 몇 년째 꽃을 피우지 않는 제주수선화 있지 참한 흙집 바람벽 아래 양지바른 곳 옮겨 심은 지 여러 해 되는 제주수선 다른 꽃 다 피고 져도 끝내 푸른 잎만 우두커니 때 되면 왔다가 때 되면 가는 제주수선 있지 같이 살던 사람 잃고 새집 지어 옮겨온 집주인 닮아선가 그해 봄 주인장 따라 옮겨 오면서 애월 바다 어디쯤 바람결에 꽃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아니면 꽃 피우길 기다리던 그 눈길 없어서일까 올해도 꽃도 없이 한철 잘 다녀갔다는 소식 (그림 : 송태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