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안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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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 새들마을 이씨 가로되시(詩)/안상학 2016. 7. 30. 12:53
어느 해던가. 재릿재 너머 정노인, 당근 금이 좋다고 당근 심었지. 알콩달콩 키워서 처자 알종아리 같은 놈들을 그 얼마나 캤던고 웬 걸, 그 놈의 당근 값이 똥값이 되어 차띠기 장삿꾼도 포기하고 말았지. 그런다고 그 걸 내다버릴 양반 아니지, 암만. 곡기 끊고 주야장창, 때마다 당근만 깎아 먹었다지. 그 독한 양반, 겨우내 당근 하나로 버텼으니, 참. 그래도 봄이 오니 다시 삽날 팍팍 꽂는데 웬 힘이 그리 있던지, 눈빛은 또 어떻고, 아마도 이 소문이 나면, 몸에 좋은 거라면 못 먹는 게 없다는 양반들, 그때서야 바리바리 돈 싸들고 당근 찾아 전국을 헤맬지도 모르지. 근데 낭패야. 정노인, 제발 마늘농사만은 짓지 말아야 될 텐데, 아니라도 더운 여름 한 철 마늘만 먹겠다면, 나, 참, 환장할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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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 선운사시(詩)/안상학 2016. 6. 29. 23:01
세상 살면서 한 곳쯤은 그리워 하면서 살아야지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내 이미 사랑을 품은 그런 한 곳쯤은 그리워 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지 꽃이라고 해서 다 피기만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 세상살면서 한 사람쯤은 그리워해야지 내 아직 한 번이라도 만나 꽃물 들이지 않았지만 그 한 사람쯤은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지 그렇다지, 그 곳 그 땅은 지는 꽃만 품에 안는다지 지는 꽃이 흙이 되어 땅빛이 붉다지 그 땅에서 피는 꽃 또한 붉다지 날이 갈수록 붉어지는 가슴이여 (그림 : 백중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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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 조각보시(詩)/안상학 2016. 6. 29. 11:47
조각난 가슴을 흘리면서 걸어왔더니 누군가 따라오며 주워 들고 하나씩 꿰어 맞춰 주었습니다. 조각난 마음을 흘리면서 걸어왔더니 누군가 따라오며 주워 들고 하나하나 꿰매어 주었습니다. 동쪽으로 난 그리움의 상처와 서쪽으로 난 기다림의 상처와 남쪽으로 난 외로움의 상처와 북쪽으로 난 서러움의 상처가 조각조각 수없이 많은 바늘땀을 상처보다 더 아프게 받은 후에야 비로소 사랑의 얼굴을 하고 돌아와 이 빈 가슴을 채웠습니다. 보기 싫다 버린 상처가 아름다웠습니다. (그림 : 이혜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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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 소풍시(詩)/안상학 2015. 11. 6. 21:15
내사 두어 평 땅을 둘둘 말아 지게에 지고 간다 새들이 나무를 꼬깃꼬깃 접어 물고 따라나선다 벗은 이 정도면 됐지 술병을 닮은 위장 속에는 반나마 술이 찰랑이고 파이프를 닮은 허파에는 잎담배가 쟁여져 있으니 무슨 수로 달빛을 밟고 가는 이 길을 마다할 것인가 무슨 수로 햇빛을 밟고 가는 이 길을 저어할 것인가 해와 달이 서로의 빛으로 눈이 먼 이 길을 뒤뚱이며 간다 어느 날은 달의 뒤편에 자리를 펴고 앉아 지구 같은 것이나 생각하며 어느 날은 태양의 뒤편에 전을 펴고 누워 딸내미와 나같이나 불쌍한 어느 여인을 생각하며 조금씩 술을 비우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담배를 당긴다 그때마다 새들은 나무를 펴고 앉아 노래를 부르거나 모래주머니에 챙겨 온 콩 두어 개를 꺼내 먹는다 가끔 바람이 불어오고 잊을 만하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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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 오래된 엽서시(詩)/안상학 2015. 7. 25. 13:51
오래된 어제 나는 섬으로 걸어들어간 적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엽서를 썼다. 걸어서 들어갈 수 없는 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며 뭍으로 걸어나간 우체부를 생각했다. 바다가 보이는 종려나무 그늘에 앉아 술에 취해 걸어오는 청춘의 파도를 수없이 만나고 헤어졌다, 그러나 단 한 번 헤어진 그 사람처럼 아프지 않았다. 섬 둘레로 저녁노을이 불을 놓으면 담배를 피우며 돌아오는 통통배의 만선 깃발, 문득 돌아오지 않는 그 사람이 걸어간 곳의 날씨를 걱정했다. 아주 오래된 그때 나는 섬 한바퀴 걸었다. 바다로 걸어가는 것과 걸어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다 잠든 아침 또 한 척의 배가 떠나는 길을 따라 그곳을 걸어나왔다. 아주 오래된 오늘 오래된 책 속에서 그때 뭍으로 걸어갔던 그 엽서를 다시 만났다. 울고 있다. 오래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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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 병산 노을시(詩)/안상학 2015. 7. 17. 12:08
쌍매화를 보러 갔다가 꽃은 못 보고 대숲 일렁이는 서쪽 너머 세상에서 가장 큰 꽃으로 지는 노을만 보았네 만대루 마루 가득 내려 쌓이는 노을 꽃잎만 보았네 쌍매화 보러 갔다가 꽃 그림자는 못 보고 그대 가슴에 사랑이 꽃으로 지는지 내 가슴 마루 가득 꽃물 들이고 우네 사라랑사랑 노을 물든 솔바람 소리 심장에 들이고 귀 기울여 우네 병산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豊川面) 병산동(屛山洞) 병산서원 :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풍산류씨의 사학(私學)이었는데, 1572년(선조 5)에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1613년(광해군 5) 정경세(鄭經世)가 중심이 되어 지방 유림이 류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863년(철종 14) ‘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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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 안동소주시(詩)/안상학 2015. 6. 8. 09:16
나는 요즘 주막이 그립다. 첫머리재, 한티재,솔티재 혹은 보나루 그 어딘가에 있었던 주막이 그립다. 뒤란 구석진 곳에 소주고리 엎어놓고 장작불로 짜낸 홧홧한 안동소주 미추룸한 호리병에 묵 한 사발 소반 받쳐들고 나오는 주모가 그립다. 팔도 장돌뱅이와 어울려 투전판도 기웃거리다가 심심해지면 동네 청상과 보리밭으로 들어가 기약도 없는 긴 이별을 나누고 싶다. 까무룩 안동소주에 취한 두어 시간 잠에서 깨어나 머리 한 번 흔들고 짚세기 고쳐 매고 길 떠나는 등짐장수를 따라 나서고 싶다. 컹컹 짖어 개목다리 건너 말 몰았다 마뜰 지나 한 되 두 되 선어대 어덕어덕 대추벼리 해 돋았다 불거리 들락날락 내 앞을 돌아 침 뱉었다 가래재... ... 등짐장수의 노래가 멎는 주막에 들러 안동소주 한 두루미에 한 사흘쯤 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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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시(詩)/안상학 2015. 6. 7. 22:04
그때 나는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노루가 고개를 넘어갈 때 잠시 돌아보듯 꼭 그만큼이라도 거기 서서 기다렸어야 했네 그때가 밤이었다면 새벽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시절이 겨울이었다면 봄을 기다렸어야 했네 연어를 기다리는 곰처럼 낙엽이 다 지길 기다려 둥지를 트는 까치처럼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네 해가 진다고 서쪽 벌판 너머로 달려가지 말았어야 했네 새벽이 멀다고 동쪽 강을 건너가지 말았어야 했네 밤을 기다려 향기를 머금는 연꽃처럼 봄을 기다려 자리를 펴는 민들레처럼 그때 그곳에서 뿌리내린 듯 기다렸어야 했네 어둠 속을 쏘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을 찾아 눈 내리는 들판을 헤매 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이 아침처럼 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그 사람이 봄처럼 돌아왔을 때 나는 거기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