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안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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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 법주사시(詩)/안상학 2017. 2. 27. 23:21
구월이던가요 푸른 길을 걸어서 들어갔지요 어디 주막에 들러 막걸리 한 잔 할 만한 얼굴 익은 주모 하나 없는 법주사 푸른 그늘을 걸어 들어갔지요 앞서가는 누군가 팔상전 그 많은 기와 중에는 유독 푸른빛을 띠는 기와가 있다는데 그 기와를 찾으면 극락을 간다고 하는데 혼잣말처럼 그 말을 흘리고 가는 사람은 정작 딴전이고요 뒤에 가던 우매한 중생 하나 그 말을 날름 주워들고서는 극락에 미련이 있는지 어쩌는지 팔상전 기와를 샅샅이 둘러보는데요 헛, 그, 참, 어디에도 푸른 기와는 없고 해서 맥없이 하늘만 멀뚱거리며 쳐다보다가 문득 팔상전 꼭대기 위로 펼쳐진 궁륭의 하늘 그 푸른 하늘 한 장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아, 글쎄, 무릎을 치며 환호작약하더라니까요 허긴, 극락이 거기 있다는 소문은 벌써부터 파다한 세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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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 불영사시(詩)/안상학 2017. 1. 19. 14:31
새가 날아오른다 그림자는 땅에 두고 간다 잊어버린 모양이다 부처는 그림자를 연못에 두고 산등을 타고 올라가 바위가 되었다 대웅보전 앞 삼층 석탑은 원래 그림자를 갖지 않았다 초파일 무렵 아홉 번째 용을 타고 들어간 선묘는 여승의 그림자로 남았다 산신당앞 할미꽃은 제 그림자를 물고 오체투지 삼매에 들었다 몸을 땅에 묻은 돌거북은 그림자의 집착을 벗은 대신 절을 등에 지는 고행을 얻었다 새는 하늘에 있었고 그림자는 땅에 있었다 새는 새였고 그림자는 그림자였다 불영사(佛影寺) : 경북 울진군 서면 하원리 천축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651년(진덕여왕 5)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인 불영사삼층석탑,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2호인 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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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 그리운 모닥불시(詩)/안상학 2016. 11. 28. 20:11
우리는 한때 모닥불이었다. 하나 둘씩 모여 불씨를 키우고 한무리 한떼 모여 불꽃으로 피어 하나 되어 어깨를 겯고 세상을 따뜻하게 불러모았다. 우리는 한때 모닥불이었다. 하나가 연기로 사라지면 둘이 불꽃 속에 뛰어들었고 둘이 한 줌의 재로 사라지면 열이 불쏘시개롤 불꽃을 지폈다. 세월이 흐르고 희끗희끗 눈발이 닥치자 하나 둘씩 모닥불에서 걸어나갔다. 숯이 되다만 검은 얼굴로 물을 끼얹은 듯 물기 어린 눈빛으로 산산이 부서져 세상 밖으로 걸어갔다. 모여서는 무쇠도 불꽃이 되던 모닥불 세상을 따뜻하게 불러모으던 그리운 모닥불 불이 되지 못한 연기만 피어올라 이젠 날벌레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 모닥불 그리운 모닥불 그 많은 불씨들 뿔뿔이 흩어져 어느 눈발 속을 걸어가고 있을까 다시 모닥불이 되는 따뜻한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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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학 - 호박에게 손을 준다는 것시(詩)/안상학 2016. 9. 1. 21:34
한 구덩이 세 포기 호박이 길을 간다 서로 싸우지 않고 뿔뿔이 삼각형 꼭짓점을 향해 가듯, 정확하게 한 포기는 언덕을 오르고 한 포기는 두둑을 기어가고 한 포기는 한사코 고추밭으로 약진한다 자연스럽다만 어쩌랴 고추밭 넝쿨을 언덕 넝쿨 옆에 슬쩍 끼워 넣는다 이내 우왕좌왕하는 두 줄기 호박에게 손을 준다는 건 장정 한 키 참나무 가지를 잘라 누이고 넝쿨을 얹어준다는 것 참나무가 손이 되어 새로 생기는 호박 손 하나하나 부여잡고 길을 일러준다는 것 길이란 이런 것이다 길이란 이런 것이다 이내 푸르고 너르게 길을 찾는 호박 넝쿨 누가 누구에게 손을 준다는 건 누가 누구의 손을 잡는다는 건 저렇게 은밀해야 한다는 듯 꼭 잡은 손 가린 잎들의 시치미가 넉넉하다 (그림 : 박일규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