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권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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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달웅 - 속리산 오르는 길시(詩)/권달웅 2019. 12. 6. 14:58
걸망을 메고 말티재를 넘어 정이품송과 오리숲을 지나 이 가을엔 구름 속 속리산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어려운 세상살이 얼마나 구불구불하고 얼마나 험난하고 숨찬지 이 가을엔 단풍 타오르는 문장대까지 올라가 보십시오. 산을 찾는 저것은 고통의 행렬 저것은 눈이 먼 중생의 행렬 세속 도시를 훌쩍 떠나 하늘 높이 솟은 저것은 비로봉 저것은 관음봉 저것은 천황봉 이 맑은 가을엔 산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아주 육신을 벗어 버리고 하늘문으로 들어선 나무들이 들려주는 나뭇잎소리 바람소리를 따라 구름과 함께 스러지는 노을빛 문장이 되십시오. (그림 : 신종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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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달웅 - 들꽃 이름시(詩)/권달웅 2019. 12. 6. 14:57
우리네 산에 들에는 하늘을 찌를 듯 키 큰 나무들도 많지만 풀벌레와 같이 자라는 키 작은 들꽃들은 더욱 많습니다. 바람 부는 날 바람 따라 산에 들에 피는 들꽃 이름을 불러보면 오래 소식 끊긴 친구들이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비비추 더워지기 으아리 진득찰 바위손 소리쟁이 매듭풀 절굿대 노랑하눌타리 딱지꽃 모시대 애기똥풀 개불알꽃 며느리배꼽 꿩의 다리 노루오줌 도꼬마리 엉겅퀴 민들레 질경이 둥굴레 속새 잔대 고들빼기 꽃다지 바늘고사리 애기원추리 곰취 개미취… 덕팔이 다남이 점순이 간난이 끝순이 귀돌이 쇠돌이 개똥이 쌍점이 복실이… 불러보면 볼수록 정겨운 들꽃 이름들 속에서 순박했던 코흘리개들이 웃습니다. (그림 : 박희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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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달웅 - 청량산 굴참나무숲시(詩)/권달웅 2019. 12. 6. 14:54
오산당을 지나 유리보전 앞에서 고개 숙이고 청량산 굴참나무 숲에 들어가면 청량한 바람소리가 솨아아 내 귀를 잡아당긴다. 조용해, 천년을 한결같이 살아온 나무들의 향내가 나지? 굴참나무 쓴 잎을 먹고 잠자는 풀쐐기도 보이지? 여기선 조그만 소리도 아주 크게 들리고 희미하게 물러선 산도 아주 가깝게 다가선단다. 김생굴 위로 도토리를 물고 가는 나무다람쥐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나지? 나비처럼 고운 산나리 노랗게 피어나는 웃음도 보이지? 솨아아 솨아아 솨아아 그래, 그래, 그래, 청량산 청량한 바람소리를 사람과 소음에 찌든 내가 약으로 마신다. (그림 : 조만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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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달웅 - 애기똥풀 꽃의 웃음시(詩)/권달웅 2019. 12. 6. 14:52
꽉 막힌 추석 귀향길이었다 참아온 뒤를 보지 못해 다급해진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산골 외진 숲 속을 뛰어 들었다 벌건 엉덩이를 까내리자 숲 속에 숨었던 청개구리가 뛰어올랐다 향기로운 풀내음 속에서 다급히 근심거리를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소리를 듣고 풀벌레들이 울음을 뚝 그쳤다 (쉿! 조용해! 무슨 소리가 났지?) 이 삼라만상의 갖가지 일에 부딪치면서 살다보니 더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참으며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처럼 참으로 힘드는 건 똥 참는 일이다 참으로 시원한 건 똥 싸는 일이다 숲속의 애기똥풀 꽃이 노랗게 웃었다 (그림 : 윤수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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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달웅 - 먼 왕십리시(詩)/권달웅 2019. 12. 6. 14:49
1964년 초겨울 역마다 서는 완행열차는 경상북도 봉화에서 청량리까 지 아홉 시간이나 걸렸다. 어머니가 고추장항아리 쌀 한 말을 이고 내 린 보퉁이에는 큰 장닭 한 마리가 대가리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이십오 원 하는 전차를 탔다. 사람들은 맨드라미처럼 새빨간 닭 볏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았다. 나는 닭대가리를 보퉁이 속 으로 꾹꾹 눌러 넣었다. 아무리 꾹꾹 눌러 넣어도 힘 센 장닭은 계속 꾹꾹거리며 대가리를 내밀었다. 빨리 전차에서 내리고 싶었다. 손바닥에서 진땀이 났다. 전차는 땡땡 거리고 가도 가도 왕십리는 멀기만 했다. (그림 : 김지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