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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중 - 간이역시(詩)/시(詩) 2024. 2. 14. 18:18
저녁 빛이 무너지면 이 간이역에는 기다림이 멈추게 돼 나무의자에 앉아있던 기다림은 어스름 속을 서성이다 철로 아래로 뛰어내리고 어떤 눈빛은 키 작은 소나무에 걸려있기도 하고 소소한 말들은 간이역 외등 불빛에 기대고 있어 나는 한 사람을 추스르느라 철길 옆을 서성였다 석양에 물린 추억이 채 아물기 전 인화되지 않은 날들은 스스로 어두워지고 기척 없는 기적소리가 되돌아서려는 나를 자꾸 잡아당겨 뫼비우스 띠 같은 만남과 헤어짐을 걸으며 느닷없는 겨울 산처럼 가볍게 야위어 갈 것이다 마지막 기차가 한 사람의 모퉁이를 오래 돌아가고 있다 (그림 : 김지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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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 - 이백원시(詩)/시(詩) 2023. 12. 28. 07:42
한끼에 이백원 받던 밥집 한그릇 먹든 두그릇 퍼 가든 똑같이 이백원 세그릇째인 사람은 있어도 한그릇만 퍼 가는 사람은 없던, 공짜 밥은 마음 다치게 한다고 따박따박 밥값 요구하던 곳 백원짜리 동전 두개 손바닥 가운데 올리고 자랑스레 내밀던 손들이 줄을 잇던, 내 얘기 좀 들어달라고 못 써서 그렇지 내가 열권 스무권짜리 책이라고 배부른 김에 장광설이 이어지던 식탁 하루 한끼 때우던 굴풋한 짐지게들이 문밖에 서 있던, 우거지 아니면 시래기 된장국이 끓던 스텐 양은 들통에서 솟아나는 뿌연 김 따라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오르면 홈리스 슬리핑백이 쌓여 있던, 예수라는 사나이보다 일찍 떠난 혜성이와 함께 일주일에 한번 밥 나르러 가던 스물한살 사장은 없고 젊은 가톨릭 수사들이 드나들던 곳 빌딩 숲 사이 언뜻 얼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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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유 - 오래된 밭시(詩)/시(詩) 2023. 11. 30. 18:09
텃밭에 앉아 그녀가 김을 맨다 뾰족뾰족 올라오는 쪽파 부추 상추 이제 막 꽃을 피운 고추도 뽑는다 힘들었다는 듯 허리를 편다 소멸해 가는 기억을 부려 놓은 듯 밭고랑에 풀과 채소들이 뒤엉켜 있다 당신의 텃밭에는 쇠비름 몇 포기 명아주 몇 포기 가물가물 떨어져 가는 부스러기들 바람에 주억거리고 있다 평생을 논밭에 손발을 묻었으니 햇살 닿는 곳은 모두 그녀의 영역 희끗희끗 마른풀 날리며 비워지는 기억을 마저 털어내고 있다 가끔은 엄마 닮은 나를 엄마라 부르며 잇몸으로 웃어주는 해맑은 얼굴 그래도 아직 나를 상실하지 않아서 참 다행한 일이다 (그림 : 이명복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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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헌 - 김장시(詩)/시(詩) 2023. 11. 30. 18:01
김장은 우리 집 제3의 명절이다. 차례나 제사는 없어도 김장은 지나온 시간과 지나갈 시간을 버무리는 시간이다. 올해 난 배추와, 파, 붉은 고추… 수년간 묶은 멸치젓갈 날것과 묵은 것 함께 잘 버무리는 시간이다. 김장은 사람을 버무리는 시간이다. 한 해 동안의 마음속에 쌓았던 슬픔과 아쉬움 툭툭 털어버리고 삶의 간 잘 맞도록 허기지지 않도록 잘 버무려 허전한 삶의 구석 채우는 시간이다. 모두 수고 많았어 수육을 돌돌 말던 김치가 말을 건넨다. 김장 김치 익어가는 내년에도 우리 가족 너무 매콤하지도 싱겁지도 않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림 : 안호범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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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 - 어머니의 정성시(詩)/시(詩) 2023. 10. 27. 19:11
간장에 꽃이 핀 걸 본 적이 있나요? 소금의 결정이 항아리 속에서 비늘처럼 반짝여요 간장에 꽃이 피는 해에는 운이 좋대요 어머니는 그 속설을 철석같이 믿었죠 콩을 삶고 짓이겨서 발효시킨 메주 한 덩이를 손 없는 날 받아서 장을 담그셨지요 바쁘게 살아가는 며느리에게도 보내고 애지중지 키운 딸에게도 보내셨어요 살아생전 하신 일이 자식 생각뿐이어서 봄볕에 익은 간장이 짭조름하게 익어가고 거친 손 마디마디에서 우러난 장맛은 세월이 가도 잊을 수가 없네요 어머니의 누런 장판 아랫목에선 곰팡이 핀 메주 뜨는 냄새가 나고 몽당빗자루로 하얀 곰팡이를 털던 어머니의 매운 손끝으로 세월을 뜨네요 (그림 : 정경자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