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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유미 - 역전 다방시(詩)/시(詩) 2023. 8. 13. 20:40
오래된 그리움 한 모금 동전과 교환하자 내 심장에서 군용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출발했다 아, 생각나, 그 풍년 빵집 옆 역전 다방 모나리자 얼굴마담은 농약 마시고 죽은 사촌누이를 참 닮았었지 온종일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처럼 양철 챙에 떨어지는 빗소리 그리고 찻잔 씻는 물소리가 넝쿨처럼 푸른 물탱크까지 기어 올라갔지 그 숲속 둥지 같은 2층에서 내려다보면 나는 이방인 거리에 버려진 트렁크 같았지 먼바다 수평선이 짙은 아이라인을 그리는 오후 무렵이면 다투어 손님 찾는 다이얼식 전화벨 소리 마른 냇갈의 물고기처럼 파닥거렸지 밑 빠진 독같이 모두 떠나고 역전 다방 불빛만 남아 쓸쓸할 때 푸시시 형광등 나간 수족관 속으로 들어가서 새우잠 청하던 얼굴마담은 우리 누이가 죽었을 때처럼 그렇게 조용했지 정말 나는 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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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 - 유행가만큼도시(詩)/정희성 2023. 8. 13. 20:37
역전 리어카 유행가만큼도 나는 사랑하지 못했네 척살할 매국오적 수배 전단도 아닌데 내가 속 뒤집어 놓고 온 여자, 못칼을 던지며 이를 갈겠네 내가 지칠 틈도 없이 잊어진 여자, 용하다는 무녀한테 부적을 사들이겠지 삼재를 넘기고 새치를 고르며 저녁 열차표를 끊을 거야 정동진 소나무 같은 데서 서성 이다가 잘 빻은 뼛가루 뿌리듯 내 얼굴 묻고 오겠지 사랑하는 당신이 울어버리면 난 몰라 난 몰라 아니 아니 나도 따라 울고 말 거야 사랑은 어쩌면 유별이 아니라 유치한 것 장 그르니에 서정문장의 고백보다 내가 더 좋아하고 말 거야, 떼쓰는 것 솜과자 하나 들이밀지 못하고 볼 빨간 홍옥 하나 쥐여 주지 못했지 안개꽃 너머 눈물 훔치던 너 따라 울지 못했지 내 먼저 울어주지 못했지 저녁 열차 개찰구 앞에서 따라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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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숙 - 뻥튀기 공작소시(詩)/시(詩) 2023. 8. 4. 12:08
화요일마다 뻥튀기를 사러 간다 방금 튀겨낸 강냉이, 헛헛한 시간을 달래기에 뻥튀기만 한 것이 없어 입에 넣고 깨물면 빠삭 부서지고 한 알 더 넣고 또 넣고 입 안 가득 고소한 냄새를 씹는다 뒤집는다 삼키지 말고 뱉어볼까 소리와 냄새와 감촉은 정직하고 채워지지 않는다 순간 미끄덩 넘어가고, 심장에서 마법사로 태어날 것 같은 뻥튀기 팡, 솟구친다 언어는 부풀고 죽은 아버지가 일어선다 살아있는 어머니가 쓰러지며 문장은 완벽해진다 나는 화요일을 뻥튀기 기계에 넣고 튀기는 꿈을 꾼다 자그만 날개를 꺼내며 벚꽃으로 눈송이로 사방으로 흩어지고 두 손으로, 두 귀를 펼쳐, 열 개의 입을 벌려 받아먹는다 종이에 프린터에 가방에 알갱이가 뛰어다니고 화요일로 가는 버스는 뜯지 않은 뻥튀기가 된다 뻥이요! 소리에 꽃과 열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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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원 - 빨래의 자격시(詩)/시(詩) 2023. 8. 2. 18:51
이 지독한 결벽증 환자는 검어지는 하늘도 씻으려 대든다 늘 젖어 있어야 마를 수도 있어 씻고 또 씻다 보면 주절주절 열린 눈물 맛을 맛볼 수가 있다 그것이 자격이다, 거품은 거품과 어울리고 물은 물과 어울려 싫어도 서로를 껴안으며 흰옷은 더욱 흰옷으로, 검은 옷은 더욱 검은 옷으로 때 묻은 과거를 일깨워 물에 젖으며 빛나게 한다 너는 나를 위하여 나는 너를 위하여 보송한 살갗만 원하는 너를 위해서 난 기어코 만신창이가 된다 거품을 물고 몸을 비비고 정신없이 돌아가다가 마지막 물구나무서기를 할 땐 참혹한 나의 깨달음이다 그것도 자격이다, 너를 위해서 거꾸로 보는 세상도 바로 보는 세상도 모두가 해 뜨고 바람 불고 비가 내리는 곳, 역류하던 피가 머리에 고일 즈음 그때서야 뜨거운 분노를 말릴 줄도 안다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