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
이필 - 분홍이 번지다시(詩)/시(詩) 2023. 7. 11. 20:34
분홍이 든다 배롱나무가 멈칫거리며 빗줄기를 가지에 매달 때 단내 같은 입김이 번진다 잎새 사이 뻗어 가는 기로에서 엇갈린 날들, 꽃 송이송이 저 형형한 산소가 한때 내쉬는 호흡의 일부였던 적 있다 나는 기압골 깊은 나무 그늘에 앉아 있다 기류하는 손끝이 닿는 흰 뼈, 수피(樹皮)를 긁으면 화사한 영향으로 물방울 털린다 구름의 맨발 사이로 갈맷빛 젖은 잎새들 분홍을 신는다 내 몸 병(病) 같은 꽃숭어리, 분홍이 있어 꽃 피고 지고 지고 피는 긴 여름의 내륙이다 늙은 시간은 쉬이 식물을 잊지 않는다 분홍은 불가촉의 공중으로 스며들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꽃잎과 떨어진 꽃잎 속으로 우리가 떠나온 약속을 마저 살아 줄 것이다 더 울울해진 몽환의 끝으로, 아가미 흔적 같은 분홍을, 나뭇가지로 밀어 올리며 장마 전선..
-
류근 - 계급의 발전시(詩)/류근 2023. 7. 11. 20:27
술이 있을 때 견디지 못하고 잽싸게 마시는 놈들은 평민이다 잽싸게 취해서 기어코 속내를 들켜버리는 놈들은 천민이다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술 한 잔을 다 비워내지 않는 놈들은 지극히 상전이거나 노예다 맘 놓고 마시고도 취하지 않는 놈들은 권력자다 한 놈은 반드시 사회를 보고 한두 놈은 반드시 연설을 하고 한두 놈은 반드시 무게를 잡고 한두 놈은 반드시 무게를 잰다 한두 놈은 어디에도 끼어들지 못한다 슬슬 곁눈질로 겉돌다가 마침내 하필이면 천민과 시비를 붙는 일로 권력자의 눈 밖에 나는 비극을 초래한다 어디에나 부적응자는 있는 법이다 한두 놈은 군림하려 한다 술이 그에게 맹견 같은 용기를 부여했으니 말할 때마다 컹컹, 짖는 소리가 난다 끝까지 앉아 있는 놈들은 평민이다 누워 있거나 멀찍이 서성거리는 놈들은 ..
-
김성신 - 성게시(詩)/시(詩) 2023. 7. 5. 17:53
파도가 울수록 가시를 세웠다 그렇게 살았다, 그래야만 살 수 있었다 칼끝이 내 속을 깊숙이 찔렀을 때 나의 바다도 도려지고 있었다 몸을 움츠리고 돌아누운 밤이면 집을 잃은 소라게들이 절룩거렸고, 포말을 검은 가시로 채운 나는 결가부좌 한 단단한 산호처럼 인과 연을 뾰족하게 세우기 시작했다 물속에 가라앉던 날들을 생각한다 모래와 비바람으로 젖은 입을 틀어막고 헛된 것이라 믿었던 것들이 그 무엇도 헛되지 않음을 비로소 알았을 때 가슴부터 발바닥까지 질펀한 갯내가 뿜어졌다 노란 알들이 오래전 당신의 얼굴 같다 그것은 비릿하고 또한 담백하다 뼈 없이 금간 여름날들이 천천히 오므라질 때 비로소, 번민임을 알겠다 견딜 수 있느냐, 는 선문답에 입속에 박힌 혀를 내밀며 나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면 해풍을 타고..
-
사윤수 - 폭우시(詩)/시(詩) 2023. 7. 5. 17:44
비가 이 세상에 올 때 얼마나 무작정 오는지 비에게 물어볼 수 없고 모르긴 해도 빈 몸으로 오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오면서 생각하니 급했던지 다 와서는 냅다 세상의 가슴팍을 때리고 걷어차고 다그친다 무엇을 내놓으라고 저렇게 퍼붓나 내가 비의 애인을 숨긴 것도 아닌데 쏟아붓는다 들이친다 하다가 안 되니까 제 몸을 마구 패대기친다 어쨌든 들어오시라 나는 수문을 열고 비의 울음을 모신다 비의 물고기들이 물밀 듯 밀려들어온다 방 안 가득히 차오르는 빗소리 인사불성 표류하는 비의 구절들 비는 이미 만취가 되었으므로 비가 들려주는 시, 비가 부르는 노래를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 다만, 그래 그래 알았어, 그래 괜찮아 하면서 달랜다, 비의 등을 다독인다 그새 얼마나 울었는지 비의 눈이 퉁퉁 부었다 밤낮을 바꾸어 추적..
-
강은교 - 혜화동시(詩)/강은교 2023. 7. 3. 14:32
―어느 황혼을 위하여 가끔 그리로 오라, 거기 빵들이 얌전히 고개 숙이고 있는 곳, 황혼이 유난히 아름다운 곳, 늦은 오후면 햇살 비스듬히 비추며 사람들은 거기서 두런두런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러다 내다본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황금빛 햇살이 걷는 것을, 그러다 듣는다, 슬며시 고개 들이미는 저물녘 바람 소리를 오래된 플라타너스 한 그루 그 앞에 서 있다, 이파리들이 황혼 속에서 익어간다, 이파리들은 하늘에 거대한 정원을 세운다 아주 천천히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실뿌리들은 저녁잠들을 향하여 가는 발들을 뻗고 가끔 그리로 오라, 거기 빵들이 거대한 추억들 곁에 함초롬히 서 있는 곳 허기진 너는 흠집투성이 계단을 올라간다 이파리들이 꿈꾸기 시작한다
-
이태수 - 자작나무 꿈길시(詩)/이태수 2023. 6. 29. 07:01
눈이 내리다 말다 하는 겨울 한낮 느리게 걷는 자작나무 숲길은 꿈길이다 이 나무들은 흰 살결을 드러내기보다 온몸으로 은빛 꿈을 내비치는 것 같다 그 사이로 걸어가다 보면 나도 몰래 그 꿈 언저리를 맴돈다 간간이 내리는 눈송이는 그 은빛 꿈에 같은 꿈을 포개는 걸까 오래전 톨스토이 영지에서 바라보던 그 자작나무들도 하늘로 팔을 뻗으면서 예까지 온 건지 보이다 말다 한다 자작나무 사잇길을 걷다가 보면 내 꿈도 검은 살결에 반쯤은 흰 빛깔을 내비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한결같이 하늘을 우러르는 자작나무의 온몸으로 꾸는 꿈같이 온몸으로 은빛 꿈을 꾸고 싶어진다 겨울 한낮 느리게 걷는 자작나무 숲길은 그런 꿈을 꾸게 부추기기도 한다 (그림 : 안소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