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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 - 분홍이 번지다시(詩)/시(詩) 2023. 7. 11. 20:34
분홍이 든다 배롱나무가 멈칫거리며
빗줄기를 가지에 매달 때
단내 같은 입김이 번진다
잎새 사이 뻗어 가는 기로에서
엇갈린 날들, 꽃 송이송이
저 형형한 산소가 한때
내쉬는 호흡의 일부였던 적 있다
나는 기압골 깊은 나무 그늘에 앉아 있다
기류하는 손끝이 닿는 흰 뼈,
수피(樹皮)를 긁으면
화사한 영향으로 물방울 털린다
구름의 맨발 사이로
갈맷빛 젖은 잎새들 분홍을 신는다
내 몸 병(病) 같은 꽃숭어리,
분홍이 있어 꽃 피고 지고
지고 피는 긴 여름의 내륙이다
늙은 시간은 쉬이 식물을 잊지 않는다
분홍은 불가촉의 공중으로 스며들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꽃잎과
떨어진 꽃잎 속으로 우리가 떠나온
약속을 마저 살아 줄 것이다
더 울울해진 몽환의 끝으로,
아가미 흔적 같은 분홍을,
나뭇가지로 밀어 올리며
장마 전선이 북상하고 있다
(그림 : 백중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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