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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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투화(投花)시(詩)/김명인 2022. 4. 29. 17:28
키 큰 접시꽃 화염도 제각각이지만 골똘한 생각이나 매달고 빗속에 나앉은 저 얼굴들은 추렴해서 기울인 낮술인 듯 서로가 얼큰하다 꽃들은 아주 낯선 곳에 이른 듯 올해도 어리둥절하고 시절 또한 내남없이 수선스럽지만 피었다 이우는 게 꽃날이니 올해의 꽃불 볼품없다 해도 어둡지 않다 불은 꺼뜨렸으나 불씨 마뜩해서 마당에 그 꽃 폈다는 소식 전하려다 문득 배낭을 메고 현관에 서서야 행선지를 말하던 네가 생각나서 그만둔다 구름 덮치며 햇살 가듯 꽃들은 제 흥망 견디면서 시드는 것 이 봄에 더 많은 결심들이 던져지고 깨어지리라 (그림 : 장태묵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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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폭설시(詩)/김명인 2020. 1. 22. 13:01
눈 몇 낱이 금세 폭설을 데리고 온다 저녁이 저무는 일을 잠시 멈추고 얼른 그 눈을 받아 지붕이며 길바닥에 펼쳐놓는다 지금은 한 해 천년이 후딱 지나가는 겨울 저녁 이른 한때, 천년만큼 무게를 덜어내고 가벼워진 사람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잠깐 얹혔다가 골목 끝으로 내려서 바삐 사라진다 나는 무연히 서서 한 염소가 삼키는 종이쪽인 듯 금세 흐려지는 저들 눈 발짝들 눈으로 주워 담는다 빨리 오시는 눈이나 늦게 오는 눈이 한결같이 큰 꽃 한 송이로 눈꽃 세상 피워낼 때 비로소 불을 켜도 좋은 밤, 그 꽃술 되려고 서걱거리는 얼음 속에 가등들 내걸린다, 바알갛게 이는 여기서도 뒤늦은 사랑이 와서 기웃대므로 더 아득한 곳까지 그리움 지펴지기 때문일까, 이제 겨울밤은 등피처럼 얇아지고 오래 세워둔 내 마음의 발전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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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복안시(詩)/김명인 2019. 11. 25. 11:10
복안이 있느냐고 네가 물었을 때 나는 머뭇거렸다, 벗겨내기 어려운 얼룩이 차양된 간유리처럼 어른거렸다 두근거림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올랐다 한 순간의 결심이 평생의 포부가 되듯이 누구에게나 제 나름의 요량은 있다 이룰지 말지 장담하지 못하는 실마리들이 형언할 수 없는 욕망으로 꿈틀거리기도 한다 쫓기듯 사는 것도 아닌데 너무 작고 볼품이 없어 이것이 내 것일까, 소용에도 닿지 않는 목록들을 뒤적거릴 때 겹쳐져 어른거리는 배경으로는 어떤 의지라도 두서없는 것, 살아지는 대로 살려고 든다면 미리 간추릴 복안이 내게는 없는 것이다 (그림 : 강철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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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기차는 지나간다시(詩)/김명인 2019. 5. 18. 22:33
주체할 수 없는 복락이 밀어닥쳤다 해도 지복인 줄 모른다면 삶은 맹물인 게지 한 장 기차표밖에 손에 든 것 없어 그대가 일러준 간이역은 지나쳐간다 정시 착, 정시 발, 저만큼 불빛을 떠미는 금속성 출렁임이 쇠의 몸을 휘감는다 어둠 외에는 전망이 없어니 기차표의 약속은 누가 사는가? 머지않아 폐쇄될 간이역을 지키는 역장에게 매표원, 검표사, 청소부, 검차수를 꼭 강요해야 하는가, 기차는 하루 한 차례 정거하고 휙 던져지는 우편낭을 받아 챙기는 일로 잡부의 일과는 끝, 승객없는 역사라도 늙은 역장은 기다린다, 무료라면 이대로가 좋아, 뭉갤 수 없는 침묵을 깔아놓고 기차는 지나간다 (그림 : 김태균 화백) 김지연 - To Treno Fevgi Stis Ok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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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월정에서시(詩)/김명인 2019. 5. 18. 22:18
가까이 우체국이 있고 바다가 활짝 펼쳐젔으니 네게 옆서나 한 장 띄워볼까, 우체국 유리문을 밀치려다 만다 아득히 넓어 너는 비경처럼 가뭇한데 저 거리를 옆서 한 장으로 메울 수 있겠니? 산굼부리는 구름을 물어 비딱하고 일체를 조섭하느라 뒤늦게 온 동풍이 먼 데 풍력을 슬그머니 건드린다 마음은 돌까 말까 망설이는 풍경에 거두어지니 노을이여, 우리 사이엔 오래전의 물결 너는 잦아도 그만인 날개 같고 나는 한사코 으르렁거리는 파도로 내달리니 안부란 미끄덩 청태 낀 바위의 세목일 뿐 누구 탓이라니, 시간이라면 네가 더 누려야지 (그림 : 김애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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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나비는 팔랑거리며 날아내리고시(詩)/김명인 2019. 5. 18. 22:11
천지가 꽃철이라지만 나비는 담장 너머 어딘가 나비 동산으로 날아가고 거기까지 닿기가 너무 막막해 꿈으로 뒤척이는 여울의 잠 깨어날까 깨어날까 허우적거리는데 귀 밝은 몰락이 몰고 오는 둘레인 듯 한순간이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른다 그때, 차창에 붙어 앉아 뒤돌아보던 그대를 알아봤었다, 가로수 길 저편 낙화는 분분했는데 부박한 날개가 돋아서 나비 동산으로 건너가려고 등이 가려운 추억에서 비로소 아뜩해진다 오지로만 다니는 버스 한두 번 바꿔 탄 것뿐인데 어느새 해는 서산마루로 기울고 날개로도 못 닿을 나비 동산 저쪽인 듯 어스름 산길이 팔랑거리며 날아내린다 여울 : 강이나 바다에서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곳 부박한 : 천박하고 경솔한 (그림 : 고재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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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보리수다방시(詩)/김명인 2019. 5. 18. 22:04
스물몇 살의 여자가 이순을 넘겨 전화를 걸어왔다 골격만 앙상한 출렁다리 되짚고 오는 밑도 끝도 없는 추락에 관해 듣다가 웬 공배인가 싶어 40년을 몽땅 제하고 이태 동안 무수히 들락거렸던 그 다방의 몽환 속에 혼자 앉았다 그녀를 기다리며 중얼거린다, 아득할 거라는데 조금도 설레지 않고 지루하기만 한 어떤 어긋남에 관한 이야기, 실은 보리수나무 그늘 탓이겠지, 한참 걸어오다 문득 다방 입구에 걸린 커다란 거울 안쪽에 무언가 놓고 왔다, 사정없이 짓뭉개진 약속이다 보니! (그림 : 백중기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