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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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얼굴 2시(詩)/김명인 2018. 10. 22. 09:43
잠에서 깨어나 하루 치의 인상과 마주할 때 반반한 거울 너머 주름투성이 저 얼굴은 어디서 이목구비를 꾸어왔을까? 오래 돌아서 온 길이라며 수심 가득 찬 표정을 풀어 새날의 기분을 구겨놓는다 얼굴은, 왜 화가 나느냐며 상전벽해도 시시로는 안 바뀐다며 어른 위에 어린아이를 덮어씌우지만 턱수염까지 쉬어선 믿을 수 없다 증명하면서 항변하면서 그물처럼 촘촘해지지만 걸려드는 건 속이 터진 심술뿐, 누군가의 저녁을 닫으려고 혼잣말로 얼굴은 중얼거린다, 한 사람이 드나드는 통로인데 왜 이리 요철이 많담, 타일이라면 이어 붙여도 똑같을 텐데! (그림 : 류성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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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포도밭 엽서시(詩)/김명인 2018. 9. 11. 19:36
한 해의 농사가 단물로만 끝나는 것 아니지만 연록의 세세를 저온 창고 가득 쟁이려면 바닷바람 머금은 그해의 포도는 가을 깊도록 여름을 일렁여야 한다, 초록을 뒤집던 잎잎의 손사래 사이로 송이송이 열매들은 다투어 초롱을 들어 보이지 해와 달 어지간히 베어 물고 어느새 무거워진 보라 알알이 가두어지면 끝물이 허전한 포도밭 머리 늙은 나무의 노쇠를 갈아치우던 노역들도 지쳐갔는지 칡 넌출을 덮어쓴 저 언덕 배미 예전의 포도밭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이제 드물다, 나무는 자라고 늙어가는 것, 포도밭이 포도의 기억으로 우거졌으니 억새 흔드는 이 가을도 어지간히 저를 지나친 셈이다 (그림 : 김대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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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꽃들시(詩)/김명인 2018. 4. 23. 08:12
낮잠에서 깨니 머리맡에 꽃소식이 당도해 있다 만선에 실려 오는 꽃나무 한 시절들 그대가 약속을 지키려 근근하듯이 꽃은 제철의 두근거림으로 한 해를 갱신한다 상청 이불 덮고 누웠으니 어디서 산비둘기 구구거리는 한낮 꽃 타래들, 다비에 든 듯 화염 사르는구나! 공손한 꽃아, 피고 지는 건 네 일이지만 나는 너를 빌려 쓰고 내일로 간다 연년세세로 물든 분홍 새 날개 펴니 거처 없이도 견디는 깃발처럼 혼곤한 신생의 새봄 안간힘으로 울뚝하다 오늘은 오늘 꽃, 수만 송이로 허무는 탑 버림받을 사랑이니 돌보라고 이 환(幻), 나에게 흘려보내는 건 아니겠지? 울뚝하다 : 성미가 급하여 참지 못하고 말이나 행동이 우악스럽다. (그림 : 김덕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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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복사꽃 매점시(詩)/김명인 2017. 11. 27. 11:52
유리문을 반쯤 젖혀놓고 젊은 여자가 문턱 밖으로 분홍 꽃술들 내다 놓고 있다 화창한 봄날인데도 손님이 없는지 볼이 바알간 너댓 살 계집아이가 제 엄마 치맛자락 붙들고 선반 위의 구름과자 내려달라고 조르는 중이다 만화경 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옛날의 버릇! 울긋불긋 다홍을 잔뜩 펼친 매점 안으로 아이가 손을 이끌어서 한참 기웃거리는데 막 걸러놓은 듯 오늘의 꽃술 향기 십 리 저쪽 오일장은 어느새 파장인지 장꾼들이 노을 저녁 둘둘 말아 지고 어둑하게 매점 앞을 지나간다 이것저것 잡동사니로 쳐도 아직은 팔 것 지천인 복사꽃 매점 (그림 : 이미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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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외로움이 미끼시(詩)/김명인 2017. 8. 4. 18:25
바다가 너무 넓어서 한 칸 낚싯대로 건져 올릴 물고기 아예 없으리라 줄을 드리우자 이내 전해져온 이 어신은 저도 외톨이인 바다 속 나그네가 물 밖 외로움 먼저 알아차리고 미끼 덥석 물어준 것일까 낚싯대 쳐들자 찌를 통해 주고받았던 수담(手談) 툭 끊어져버리고 미늘에 걸려온 것은 외가닥 수평선이다 외로움도 지나치면 해 종일 바닷가에 서서 수평선에 이마 닿도록 나도 한 마리 마음물고기 따라나서지만 드넓은 바다 들끓는 파도로도 더는 제 속내 펼쳐 보이지 말라고 자욱하게 저물고 있는, 저무는 바다 그 파랑 속속들이 헤매고 온 물고기 한 마리 한입에 덥석 나를 물어줄 때까지 나 아직도 바닷가에 낚시 드리우고 서 있다 어느새 바다만큼 자라 내 앞에서 맴도는 물고기 한 마리 마침내 나를 물고 저 어둠 한가운데 풀어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