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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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척산 어귀시(詩)/김명인 2016. 5. 24. 18:10
우리가 척산 어귀쯤에서 부두로 돌아오는 저녁 배 바라볼 때 수평에 잠방거리는 노을, 하필이면 빈 배에 실린 만선 홍역이 내 눈시울 가으로도 하역되는지, 그러고 보니 젊은 날 항원(抗原) 이미 몸 속에서 무너져 사랑을 두고 어떤 되풀이도 나 익숙지 못하네 다만 갈매기 두어 줄금의 끼룩거림 환한 수정 구슬로 꿰여 비로소 나지막한 통통배 소리 끄을려 온다 한 줌을 움켜쥐랴, 한 아름 안아보랴 틈새로 다 새어버리는 다짐, 부여잡은 잔술 하나만큼 출렁이게 가두면 모든 근원이 지금 한 주점임을, 왜 하루치의 차일 어김없이 내리느냐 젖은 홍포 벗겨내고 바다 맨살을 감싸는 지상의 이불 한 채, 어느새 아득한 수평 끝까지 검게 물들이고 있다 척산 :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에 있는 리(里)이다 (그림 : 김정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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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봄길시(詩)/김명인 2016. 4. 21. 19:18
꽃이 피면 마음 간격들 한층 촘촘해져 김제 봄들 건너는데 몸 건너기가 너무 힘겹다 피기도 전에 봉오리째 져내리는 그 꽃잎 부리러 이 배는 신포 어디쯤에 닿아 헤맨다 저 망해(亡海) 다 쓸고 온 꽃샘바람 거기 부는 듯 몸 속에 곤두서는 봄 밖의 봄바람! 눈앞 해발이 양쪽 날개 펼친 구름 사이로 스미려다 골짜기 비집고 빠져나오는 염소떼와 문득 마주친다 염소도 제 한 몸 한 척 배로 따로 띄우는지 만경(萬傾) 저쪽이 포구라는 듯 새끼 염소 한 마리 지평도 뿌우연 황삿길 타박거리며 간다 마음은 곁가지로 펄럭거리며 덜 핀 꽃나무 둘레에서 멈칫걸자 하지만 남몰래 출렁거리는 상심은 아지랑이 너머 끝내 닿을 수 없는 항구 몇 개는 더 지워야 한다고 닻이 끊긴 배 한 척 (그림 : 김인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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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물가재미식해시(詩)/김명인 2016. 3. 16. 13:54
삭은 혀끝이 거머쥘 감칠맛 어디 있겠냐고 어머니, 할머니, 할머니의 그 할머니 구황하려 매운 손끝으로 버무려 온 물가재미식해 한 젓가락 듬뿍 퍼 올리고 싶다 흔하디흔한 물가재미 큼직큼직 채 썰어 무며 조밥, 마늘, 고춧가루에 비벼 간 맞춘 뒤 오지에 담아 아랫목에 두면 며칠 새 들큰새콤 퀴퀴하게 삭아 있던 밥 식해, 왜 오묘함은 가슴과 사귀는 좁쌀 별인지 밤새워 푸득거리는 눈발 한 채여도 안 서럽던! 가재미식해 : 함경도지방 향토음식의 하나이다. 동해안 맑은 물의 노랑가자미와 북관지역의 좁쌀을 잘 이용한 저장식품이다. 만드는 법은 물 좋은 노랑가자미를 골라 내장과 머리를 떼고 얼간으로 48시간 정도 절여 보자기에 싸서 큰 돌로 눌러놓은 다음 먹기 좋은 크기로 토막을 친다. 메조밥을 되직하게 지어 마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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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은혼시(詩)/김명인 2015. 9. 6. 12:26
바닥의 무료까지 지치도록 퍼낼 생(生) 거기 있다는 듯 모든 풍경들 제 색깔을 마저 써버리면 누런 햇빛 알갱이들 강을 싸안고 흩어지는 것 같아 물소리 죄다 흘러 보내더라도 더는 못 가게 마음 방죽 쌓아 너를 가둔다 잎들을 얽으려 할 때 햇살들이 마구 엉겨 붙어서 초록 기억으로 흠뻑 젖었던 적은 없느냐? 그때에도 사나운 이목, 다리 아래 격랑보다 더 두려웠다 나는 무슨 워낭으로도 네 베틀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어서 갈바람 낙엽 행낭에 담아 세월이라 부친다 받아 보거든 은하 물살 거세었음을 알리라 머리 위로 깃털 빠진 까막까치들 날아간다 길 아닌 길도 땅 위의 것이라고 이제 내가 겨우 깨쳐서 놓고 있는 징검다리, 저문 혼례 그 언저리나 맴도는 이 가을날 꿈같이, 빛같이 은혼식(銀婚式 silver wedd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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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기차는 꽃그늘에 주저앉아시(詩)/김명인 2015. 9. 4. 01:21
졸음기 그득 햇살로 쟁여졌으니 이곳도 언젠가 한 번쯤은 와 본 풍경 속이다 화단의 자미 늦여름 한낮을 꽃방석 그늘로 펼쳐 놓았네 작은 역사는 제 키 높이로 녹슨 기차 한 량 주저앉히고 허리 아래쪽만 꽉 깨물고 있다, 정오니까 나그네에겐 분별조차 고단하니 기다리는 동안 나도 몇만 톤 졸음이나 그늘 안쪽에 부려 놓을까? 불멸불멸하면서 평생 떠도느라 빚졌으니 모로 고개 꺾은 저 승객도 이승이란 낯선 대합실 깨어나면 딱딱한 나무 의자쯤으로 여길 것인가 자미 : 배롱나무꽃 (그림 : 김지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