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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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안동(安東) 저쪽시(詩)/김명인 2017. 6. 13. 10:56
중앙선 밤 기차를 타고 고향 가는 길 비좁은 통로가 입석으로 붐비는데 구석자리 의자에 기대 번역본 괴테를 읽고 섰던 감색 교복에 흰 칼라 차림의 여학생, 가슴에 매단 배지(校標)가 눈부시게 환했다 우리도 그렇게 누군가의 등불로 캄캄한 어둠을 밝혔던 것은 아닐는지 그 밤, 기차가 스치고 지나던 칠흑 창밖에는 몇 송이 꽃불도 돋아났겠지만 기억이란 아득하다가도 그렇게 찰나로 피어나는 한 꽃송이 같은 것 영주 어딘가 열차가 서고 그 새벽 여학생은 내렸지만 가슴에 매단 꽃이 꼭 배꽃인 것 같아 마흔 해도 더 묵힌 갈피에서 꽃 이파리 펄럭인다 안동에서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가야 할 한 나절이 아직도 어둠 저쪽에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림 : 임재훈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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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마음의 정거장시(詩)/김명인 2017. 3. 26. 11:50
집들도 처마를 이어 키를 낮추는 때절은 국도변 따라 한 아이가 간다 그리움이여, 마음의 정거장 저켠에 널 세워 두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면 저기 밥집 앞에서 제재소 끝으로 허술히 몰려가는 대낮의 먼지바람 십일월인데 한겨울처럼 춥다 햇볕도 처마밑까지는 따라들지 않아 바람에 구겨질 듯 펄럭이는 이발소 유리창 밖에는 노박으로 떨고 선 죽도화 한 그루 그래도 피우고 지울 잎들이 많아 어느 세월 저 여린 꽃가지 단풍들고 한 잎씩 저버리고 가야 할 슬픔인 듯 잎잎이 놓아 버려 텅 비는 하늘 노박(魯朴) : 어리석고 소박(素朴)함 (그림 : 황재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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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다시 영동(嶺東)에서시(詩)/김명인 2016. 12. 16. 15:37
언제나 뒤에서 잡았다 바다는 쓸쓸한 손이 되어 더러 먼 땅으로 우리를 놓아 보냈다가 궂은 날 더 먼 곳에서 고단한 우리들을 기다려 흐린 물결 위 청둥오리 몇 마리 띄워 놓고 저렇게 제 속을 무심히 헤쳐 보이는 것일까 계절은 찢겨 지나며 날마다 푸른 깃대에서 깃발을 벗겨 가 버리지만 말없이 떠난 것들도 이처럼 돌아와 빈 자리 채우며 끊임없이 자맥질하는 모습을 바라보면 문득 따스한 밝음이 내 안에서 출렁인다 헤쳐 가야지 가시를 찔러 오는 세상 같은 건 껴안아서 흘려 보내고 내 여기 떠올라야 하므로 너울 속 끝없이 곤두박질치면 무엇 하나 돌려보내지 않고 바다는 언제나 파도만 들어서 귀뺨을 후려칠까 한 생애가 눈물 가득 잔 물결로도 출렁이고 서러울수록 그 위에 엎어져 함께 흐느껴 가면 어둠 속 더욱 넓어지는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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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줄포 여자시(詩)/김명인 2016. 8. 27. 11:22
낡은 유행가 좇아가느라 나 거기 주저앉았다 희망이 숨차느냐고 놀고 먹는 지 벌써 이태째. 포장 친 간이주점에서 보면 바다는 넘을 고개도 없는데 보리 고랑 가득 펴고 있다 남녘엔 봄 지나가고, 몇 년만의 외출이냐고 한 가족이 아직은 시릴 모래톱에 맨발을 적신다 짧은 봄날에는 채 못피우는 꽃봉오리도 많다 시절이 저 여자에게는 유독 가혹했을 것이다 접시에 담겨서도 꼼지락거리는 잘린 낙지발 중년이 입안에서 쩍쩍거릴 때 목포에서는 한창 잘 나갔지요, 거름을 파고 들었던 홍어찜이 이제서야 콧속을 탁 쏜다 여기도 예전의 줄포는 아니라요, 어느 새 경계 넘어버린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것 입맛이라고 저 여자, 버릇처럼 손장단으로 이길 수도 없을 붉은 봄꽃 피워 문다 (그림 : 김지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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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장엄미사시(詩)/김명인 2016. 8. 13. 18:36
홀로 바치는 노을은 왜 황홀한가 울음이라면 절량(絶糧)의 울음만큼이나 사무치게 불의 허기로 긋는 성호(聖號)! 저녁거리 구하러 나간 아내가 생시에 적어둔 비망록이 다 젖어버려 어떤 경계도 정작 읽을 수가 없을 때 나 한 척 배로 속내 감춘 컨테이너 같은 하고많은 권태 적재하고서 저 수평선을 넘나들었지만 불이 시든 뒷자리에서 그리워하는 것은 부질없다 노을이 쪼개고 간 항적(航跡)마저 지우고 어제처럼 단단한 어둠으로 밤의 널판자들 갈아 끼워야 하지 그러면 어스름이 와서 내 해안선을 입질하리라. 주둥이를 들이밀 때마다 조금씩 마음의 항구가 떠밀리고 마침내 지워지면 뼛속까지 부서져 파도로 떠돌리 어떤 상처도 스스로 아물게 하는 신유(神癒)가 있는가 딱지처럼 천천히 시간의 블라인드 내리면 풍경과도 차단되어 비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