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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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저녁 눈시(詩)/김명인 2016. 8. 13. 18:32
팔당 가는 막차는 낮 동안 내린 눈 때문에 안 올지도 모른다고, 매표소 책상 앞에는 갓 서른 되었을까, 길 막힌 사내에게 수줍게 대답하는 젊은 아낙뿐이다 머리숱 짙고 복숭아빛 볼 발그레한 저 한창 나이! 또 눈이 오려는지, 창밖으로는 강아지 한 마리 아까부터 공터의 적막을 즙겁게 갖고 논다 동네 밖은 옛 성인지, 성채로 두른 희미한 산줄기 어느새 지척까지 밀물어오는 어둠의 접군(接軍)들, 일행은 민박도 어렵다는 이 작은 마을에서 난감한 밤 지새야 하는지 매표소 유리창 한 폭만큼 좁혀진 공터를 내다보면 희끗거리는 것만으로도 세상 경계 지워버리는 눈발, 다시 한 빛깔 다해 내리기 시작한다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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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17시 반의 기적시(詩)/김명인 2016. 8. 13. 18:31
오후 다섯 시 반의 기적 속으로 기차가 멎고 승객 몇이 내려서자 날리는 꽃잎도 없이 무궁화호 줄기째 산모퉁이로 꺽어진다. 새삼스러운 기적이라니, 이제 떠난 열차는 기다림을 남기지 않는다. 올 데까지 와버린 길 끝인 듯 몇 년째 유폐되었는지, 건너편 컨테이너를 마침 저 생생한 기중기가 커다란 쇠 젓가락으로 화차의 빈 좌대 위에 가볍게 들어 얹을 때, 비로소 저들 아득한 이주 너머로 오래된 일상 농담처럼 무너지지만 어떤 기다림은 그렇더라도 마침내 지켜내는 철길의 약속도 있어야 한다. 나는 이 길로 자진해서 왔다. 그렇고 그런 다짐과 들끓는 후회 사이로 아직도 끌고 가야 할 길들 등 뒤에 남아 있지만 정거 없이 방금 스쳐간 특급이나 하릴없이 두리번거릴 완행의 지체를 한낮도 다 기운 지금 돌려세우자는 것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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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봄 날시(詩)/김명인 2016. 8. 13. 18:29
어떤 기다림이 지쳐 무료가 되는지. 가끔씩 개를 끌고 골목 끝으로 나가 지나가는 차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눈이 시리도록 깜박이는 신호등 네 길거리지만 나는 너의 행간이 아니라서 비켜섰다가 돌아오는 길, 겨우내 키를 움츠려 넘보지 못했던 엄동의 담장 저쪽, 못 지킨 약속 하나 있어 끝끝내 봄 밀려오는지, 까치발로 그 추위 다 받들어 가장 높은 가지 끝으로 목련 한 송이 피어난다. 다시 며칠 사이에도 내내 할 일이 없어 개를 끌고 골목 끝으로 나가면 건답 위 봄 파종같이 뿌려진 인파들, 무더기 밀린 약속 한꺼번에 치러내려는 듯 만개의 목련, 길바닥까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세상은 참 바쁘다, 어느 사이 나는 얼음의 문신 홀로 몸속에 새겨 넣었는지. 해동이 안 되는 기다림과 권태 속으로 느릿느릿 시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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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새벽까지시(詩)/김명인 2016. 8. 13. 17:58
한 장씩 더듬으며 너를 떠올리는 것은 내가 이 풍경을 대충 읽어버린 까닭이다. 어두워지더라도 저녁 가까이 창문을 달아두면 검은 새들이 날아와 시커멓게 강심(江心)을 끌고 간다. 마음의 오랜 퇴적으로 이제 나는 이 지층이 그다지 초라하지 않다. 그 창 가까이 서 있노라면 오늘은 더 빨리 시간의 전초(前硝)가 무너지는지, 골짜기를 타고 어느새 핏빛 파발이 번져오른다. 곧 어둠의 주인이 찾아들겠지만 내가 왜 옹색하게 여기 몇 가을째 세들어 사는지, 헤아리지 않아서 이미 잊어버렸다! 어떤 저녁에는 병색 완연한 새 한 마리가 내 사는 일 기웃거리다 돌아가면 나도 아주 하릴없어져 어스름 속에 쭈그리고 앉아 불붙는 아궁일 물끄러미 들여다보거나 정 심심해지면 땅거미 가로질러 하구 저쪽 갯벌 끝 끝까지 걸어가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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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그리운 몽유(夢遊) 2시(詩)/김명인 2016. 8. 13. 17:55
창을 열면 십일월 같기도 한 늙은 봄밤이 어스름을 다해 쓸쓸한 백야(白夜) 쪽으로 밀려가고 있다, 출렁이며 바다 가득히 여명이매 그대로 말미암아 아침을 맞고 문득 저물고 이처럼 밤이 든 뒤에도 수런대며 밀물어오는 시간들 이렇게 참람할 줄을! 그러므로 꿈으로 고단하거나 깨어 있거나 흘러가는 달빛 그리움에 온몸이 젖는다 해도 내 사무치며 놀았던 세상의 끝 여기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아침이 되고 다시 해지고 바람 불고 달 뜨고 이런 순환이 저 바다와 더불어 막막하므로 그대를 부추겼던 바람은 바람대로 헤매고 몽유 속으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푸른 잎무늬의 파도를 밀어넣느니 허공을 적시던 마음 잠깐의 기쁨으로 온몸을 떨 때에도 곧 가지 끝으로 미끄러져가며 여름을 모두 겪었다 하겠느냐 잘 잤느냐, 내 사랑, 긴 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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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그리운 몽유(夢遊) 1시(詩)/김명인 2016. 8. 13. 17:54
짧은 길이 제 힘을 다해 언덕 저쪽으로 키 낮은 처마들을 밀어붙이는 좁은 골목길 저편에 그대의 집이 있다 지붕 위의 안테나들이 거미줄 치듯 허공을 그어놓은 가파른 언덕길이 잠깐의 현기증으로 기대 세우는 담벼락 어디서부턴가 나, 몽롱에 디딘 듯 어지럼 속을 더듬어 골목 저켠으로 건너가면 연기 속으로 부여잡는 손, 어디선가 추억의 저녁 밥 짓는 냄새 모든 철책들 덜컹거려 쪽문이 열리고 젊은 부인이 아이를 부를 때 우우 대답처럼 떨어지는 몇 송이의 성긴 눈발 그때 환청은 돋아나지 꿈의 시간인 양 이승은 그 배경으로 나앉지, 지주목 사이로 질척거리며 나, 바꾸어서 오랜 현실인 그대 몽유에서 헤맬 때 잠깐의 꿈속을 환생이라 믿었던가 그렇다면 너무 긴 몽유여, 토막난 기억들이 빈틈없이 징검다리들 이어놓아도 거기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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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할머니시(詩)/김명인 2016. 8. 13. 17:51
삼률 지나다가 정거장 건너편, 텃밭이었던 자리 이젠 누구네 마당가에 저렇게 활짝 핀 봉숭아 몇 포기, 그 옆엔 빨간 토마토가 고추밭 사이로 주렁주렁 익고 있다 왜 내겐 어머니보다 할머니 기억이 많은지, 멍석을 말아내고 참깨를 털면서 흙탕물이 넘쳐나는 봇도랑 업고 건너면서 둑방가에 힘겨워 쉬시면서, 어느새 달무리에 들고 그 둘레인 듯 어슴프레하게, 할머니 아직도 거기 앉아 계세요? 나는 장수하며 사는 한 집안의 내력이 꼭 슬픔 탓이라고만 말하지 않겠다 다만 우리가 추억이나 향수라는 이름 말고 저 색색의 눈높이로 고향 근처를 지나갈 때 모든 가계는 그 전설에 도달한다, 그리고 뒷자리는 늘 비어서 쓸쓸하다 (그림 : 한희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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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고산행(高山行)시(詩)/김명인 2016. 5. 29. 17:24
열차는 평산을 지났다 한다. 산역(山驛)에서는 낡은 의자에 기댄 남자들 두엇, 불을 끄고 통과할 어느 역에도 어쩌면 정거하지도 않을 기차를 우리들은 기다렸다. 밤은 깊고 자정 가까이 달은 떠올라 헌 거적대기 같은 빛이 세상을 덮어주기도 하였지만 오늘 가지 못하면 내일 갈 수도 없고 마침내 영영 가지 못할 그곳에 가기 위하여 저쪽 어느 역에서도 우리들처럼 정든 마을에서 빠져나와 어둠 속에 서성대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발 밑에는 버리고 가는 낙엽 또는 떨어져 뒹구는 젖은 노자 몇 닢. 고산역(高山驛) : 강원도 고산군 고산읍의 동쪽에 있는 기차정거장. 강원선이 통과하고 있다. (그림 : 김지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