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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다림이 지쳐 무료가 되는지.
가끔씩 개를 끌고 골목 끝으로 나가
지나가는 차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눈이 시리도록 깜박이는 신호등 네 길거리지만
나는 너의 행간이 아니라서
비켜섰다가 돌아오는 길,
겨우내 키를 움츠려 넘보지 못했던
엄동의 담장 저쪽, 못 지킨 약속 하나 있어
끝끝내 봄 밀려오는지,
까치발로 그 추위 다 받들어
가장 높은 가지 끝으로 목련 한 송이 피어난다.
다시 며칠 사이에도 내내 할 일이 없어
개를 끌고 골목 끝으로 나가면
건답 위 봄 파종같이 뿌려진 인파들,
무더기 밀린 약속 한꺼번에 치러내려는 듯
만개의 목련, 길바닥까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세상은 참 바쁘다, 어느 사이 나는
얼음의 문신 홀로 몸속에 새겨 넣었는지.
해동이 안 되는 기다림과 권태 속으로
느릿느릿 시선이 가 닿는 저 건너 공터 어디쯤
겨우내 짓고 있었던 마음의 폐허,
그 얼음집 다 세우기도 전에
어느새 끈을 끊고 개가 사라져버린 골목 입구를
혼자서, 혼자서 우두커니 지켜본다.(그림 : 정세화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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