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공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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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 늙어가는 함바집시(詩)/공광규 2019. 3. 26. 19:25
멈춘 시계가 5시 53분을 가리키고 있는 저녁 폐자재가 굴러다니는 강변 목련나무 아래 함바집은 판자를 덧댄 문을 헌 입처럼 가끔 벌려서 개나리나무에 음표를 매달고 있습니다 멀리서 기차는 시간을 토막 내며 철교를 지나고 술병을 세운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얼굴에 팬 주름을 악기처럼 연주하며 뽕짝으로 지르박으로 늙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없는 날에도 기차는 녹슨 철교 위에서 여전히 시간을 토막 내며 지나고 자동차는 요란한 청춘처럼 잘못 살고 있는 중년처럼 속도를 몸을 위반하며 지날 것입니다 강물은 길이를 잴 수 없을 만큼 흘러가고 풀잎은 수없이 시들고 또 새 풀잎을 낼 것입니다 사랑도 몸도 연꽃처럼 시들고 구겨지고 전등은 여전히 인생을 측은하게 바라볼 것입니다 우리가 없는 날에도 목련나무 아래 함바집 녹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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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 이달봉시(詩)/공광규 2018. 6. 9. 22:35
제주는 오름이 삼사백 개라는데 곡선이 부드러운 용눈이오름이 있고 낮은 관목이 숲을 이루는 다랑쉬오름이 있고 억새가 물결치는 큰사슴오름이 있고 오솔길이 아름다운 따라비오름이 있다더라 산정호수를 품은 한라산 기슭 사라오름은 아직 가보지 못한 곳 그런 유명한 오름들보다 나는 사람 발길이 드문 이달봉이 좋더라 체면 차리지 않고 맨발로 맘대로 노래하며 걷던 곳 유명하거나 빼어나지 않은 아무렇게나 지은 시골 사내이름 같은 잡풀 잡꽃이 듬성듬성한 시골 언덕 같은 이달봉 :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산71-1에 위치한 기생화산으로 해발 488.9m이며 높이 119m이다. 이(二)+달(높다·산의 고어)+오름으로 분석되어 두 개의 높은 봉우리로 이뤄진 오름으로 해석되어진다. 즉 이달은 두 개의 봉우리로 높은 봉우리를 큰오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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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 서울역시(詩)/공광규 2018. 5. 30. 16:33
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발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 킬로미터 목포까지 414 킬로미터 강릉까지 374 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 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인천까지는 38킬로미터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개성까지는 더 가까울 것이다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 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 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열차로 간다면 6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내가 못 가본 저곳들은 얼른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대동강 건너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의 어디쯤에 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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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 미루나무시(詩)/공광규 2018. 5. 24. 10:17
앞 냇둑에 살았던 늙은 미루나무는 착해빠진 나처럼 재질이 너무 물러서 재목으로도 땔감으로도 쓸모없는 나무라고 핀잔을 받았지 가난한 부모를 둔 것이 서러워 엉엉 울던 사립문 밖의 나처럼 들판 가운데 혼자 서서 차가운 북풍에 엉엉 울거나 한 여름 사춘기처럼 잎새를 하염없이 반짝반짝 뒤집었지 미역 감던 아이들이 그늘에 와서 놀고 논매던 어른들이 지게와 농구들을 기대어 놓고 낮잠 한숨 시원하게 자면서도 마음만 좋은 나를 닮아 아무 것에도 못쓴다며 무시당했지 아무도 탐내지 않아 톱날이 비켜 갔던 나무 아주 오래오래 살다 천명을 받고 폭풍우 치던 한 여름 바람과 맞서다 장쾌하게 몸을 꺾은 나무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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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 대전역 가락국수시(詩)/공광규 2018. 4. 8. 17:19
철로가 국수가락처럼 뻗어있다 철로에 유리창에 승강장에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가 국숫발을 닮았다 청양에서 대치와 한티고개를 울퉁불퉁 버스로 넘어와 김이 풀풀나는 가락국수를 먹던 생각이 난다 부산행열차를 기다리던 열 몇 살 소년의 정거장 소나기를 맞으며 뛰어오던 열 몇 살 소녀가 있었던 대전역이다 사십 년 전 기억이 모락모락 수증기로 피어오르는 국수그릇 선로도 건물도 오고사는 사람도 많아지고 국수그릇과 나무젓가락이 합성수지로 바뀌었지만 국수맛은 옛날처럼 얼큰하다 가락국수가 소나기처럼 첫사랑처럼 하나도 늙지 않았다 (그림 : 홍미옥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