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공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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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 병산습지시(詩)/공광규 2014. 9. 22. 17:07
달뿌리풀이 물별 뜬 강물을 향해 뿌리줄기로 열심히 기어가는 습지입니다 모래 위로 수달이 꼬리를 끌고 가면서 발자국을 꽃잎처럼 찍어놓았네요 화선지에 매화를 친 수묵화 한폭입니다 햇살이 정성껏 그림을 말리고 있는데 검은꼬리제비나비가 꽃나무 가지인 줄 알고 앉았다가는 이내 날아갑니다 가끔 소나기가 버드나무 잎을 밟고 와서는 모래 화선지를 말끔하게 지워놓겠지요 그러면 또 수달네 식구들이 꼬리를 끌고 나와서 발자국 꽃잎을 다시 찍어놓을 것입니다 그런 밤에는 달도 빙긋이 웃겠지요 아마 달이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날은 보나마나 수달네 개구쟁이 아이들이 매화 꽃잎 위에 똥을 싸놓고서는 그걸 매화 향이라고 우길 때일 것입니다 병산습지 : 경북 안동 낙동강변 병산서원앞에 위치한 습지 (그림 : 박광진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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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 지족해협에서시(詩)/공광규 2014. 9. 21. 19:20
갯가 푸조나무 아래서 가을단풍을 등불 삼아 향교에서 빌려온 『주자어류』를 읽다가 내려놓고 통무를 넣고 끓인 물메기국 한 그릇을 비웠습니다 해안을 한참 걸어가 만난 곳이 지족해협이라던가 연을 날리는 아이들과 굴과 게와 조개와 멍게를 건지고 갈치와 전어와 쭈꾸미를 잡는 노인들을 만나 이곳 풍물을 묻고 즐거워하였습니다 갈대를 엮어 올린 낮은 지붕에는 삶은 멸치들이 은하수처럼 반짝거렸는데 하늘로 올라가는 용의 모습을 닮았더군요 아하, 이곳에서는 멸치를 미르치라 부른다는데 용을 미르라고 부르니 미르치는 용의 새끼가 아닐는지요 미르라고 부르는 은하수 또한 이곳 바다에서 올라간 멸치 떼가 아닐는지요 참나무 말뚝을 박은 죽방렴 아래에서는 남정네들이 흙탕물에 고인 멸치를 퍼 담고 있었습니다 흙탕물 바가지에 담긴 멸치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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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 여여산방을 떠나며시(詩)/공광규 2014. 1. 20. 11:40
산방 아궁이에 장작불 때며 자고 일어난 늦가을 아침 비바람에 떨어진 나뭇잎이 마당가에 쌓여 있다 정원에 솟은 검은 바위와 마른 풀은 빗물에 젖었는데 돌담 아래 구절초 몇 대가 늙어가는 친구의 머리처럼 희끗하다 꽃대가 쓰러진 꽃무릇 잎은 푸르게 겨울을 지내겠지 잎을 털어낸 매화나무 가지는 내년 봄에도 일찍 꽃이 피겠구나 나무로 엮은 대문을 밀다가 뒤돌아보니 어제 낮 환하게 반기던 화단의 노란 국화 다발은 얼굴을 수그리고 영국사 가는 휘어진 길을 산안개가 가리고 있다. (그림 : 김성실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