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공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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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 대전역 가락국수시(詩)/공광규 2016. 1. 25. 19:23
행신역에서 고속전철을 타고 내려와 새로 지은 깨끗한 역사 위에서 철로를 내려다보면서 가락국수를 먹고 있다 열여섯 살 때 처음 청양에서 버스를 타고 칠갑산 대치와 공주 한티고개를 투덜투덜 넘어와 부산행 완행열차를 기다리던 승강장에서 김이 풀풀 나는 가락국수를 먹던 생각이 난다 지금은 쉬운 여섯이니 벌써 사십년이나 지났다 그동안 선로도 많아지고 건물도 높아지고 오고가는 사람도 많아졌다 국수 그릇도 양은에서 합성수지로 바뀌었다 내가 처음으로 옛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그러나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물냄새와 노란 단무지 색깔과 빨간 고춧가루와 얼큰한 맛은 똑같다 첫사랑처럼 가락국수도 늙지 않았다 이런 옛날이 대전역이 좋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도 국수발을 닮아서 좋다 (그림 : 홍미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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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 시래기 한 움큼시(詩)/공광규 2015. 8. 1. 16:26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겨졌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나올 때 담벼락에 걸린 시래기 한 움큼 빼서 코에 부비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 치는 식당 주인에게 회사원은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막무가내 식당 주인과 시비를 벌이고 멱살잡이를 하다가 파출소까지 갔다 화해시켜보려는 경찰의 노력도 그를 신임하는 동료들이 찾아가 빌어도 식당 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몫 보려는 식당 주인은 그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이 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 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한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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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 얼굴반찬시(詩)/공광규 2015. 6. 21. 10:20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 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때는 외지에 나가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그림 : 이미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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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 자화상시(詩)/공광규 2015. 6. 21. 10:19
밥을 구하러 종각역에 내려서 청계천 건너 다동 빌딩숲을 왔다갔다가 한 것이 이십 년이 넘었다 그러는 동안 내 얼굴도 도심의 흰 건물처럼 낡고 때가 끼었다 인사동 낙원동 밥집과 술집으로 광화문 찻집으로 이런 심심한 인생에 늘어난 것은 주름과 뱃살과 흰 머리카락이다 남의 비위를 맞추며 산 것이 반이 넘고 나한테 거짓말을 한 것이 반이 넘는다 그러니 나는 가짜다 껍데기다 올해 초파일 절에서부터 오후 내내 마신 막걸리가 엄지발가락에 통풍을 데리고 와서 몸이 많이 기울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어제는 사무실 가까이 와서 저녁을 먹고 간 딸이 아빠 얼굴이 가엾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나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가 똑같다 안구에 바람이 불고 돋보기가 있어야 읽고 쓰는데 편하다 맑은 날에도 별이 흐리다 눈이 침침한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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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 청양장시(詩)/공광규 2015. 5. 22. 16:50
토끼 팔러온 할머니 입이 오종종 토끼 입이다 소 팔러 온 할아버지 눈이 왕방울 눈깔이다 고양이 팔러 온 할머니 얼굴이 고양이 상이다 족제비 가죽 팔러 온 할아버지 턱이 뾰족하다 닭 팔러 온 할머니 종아리가 닭살이다 뱀 팔러 온 할아버지 눈이 뱀눈이다 강아지 팔러 온 할머니 눈이 강아지 눈망울이다 염소 팔러 온 할아버지 수염이 염소수염이다 양 팔러 온 할머니 젖이 무릎까지 늘어졌다 돼지 팔러 온 할아버지 코가 돼지코다 밴댕이젖 팔러 온 할머니 성질이 밴댕이 소갈머리다 새우젖 팔러 온 할아버지 허리가 새우처럼 굽었다 메기 팔러 온 할머니 입이 메기입이다 원숭이 데리고 온 약장수가 원숭이를 닮았다 약장수 주변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다 모두 길짐승과 날짐승과 물고기를 닮았다 청양장 : 충청남도 청양군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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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 낙원동시(詩)/공광규 2014. 12. 6. 23:58
평생 낙원에 도착할 가망 없는 인생들이 포장마차에서 술병을 굴린다 검은 저녁 포장도로 죽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붉은 비닐포장 꽃에서 잉잉거리며 일벌 인생을 수정하고 있다 꽃 한 번 피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열매도 보람도 없이 저물어가는 간이의자의 인생을 술병을 바퀴 삼아 굴리는 사이 포장마차는 달을 바퀴 삼아 은하수 이쪽까지 굴러와 있다 소주를 주유하고 안주접시를 바퀴로 갈아 끼우고 술국에 수저를 넣어 함께 노를 젓고 젓가락을 돛대로 세워 핏대를 올려도 제자리인 인생 포장마차가 불을 끄자 죽은 꽃에서 비틀비틀 접힌 몸을 펴고 나온 일벌들이 술에 젖은 몸을 다시 접어 택시에 담는다 (그림 : 장용길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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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 겨울 산수유 열매시(詩)/공광규 2014. 10. 14. 16:33
콩새부부가 산수유나무 가지에 양말을 벗고 앉아서 빨간 열매를 찢어 먹고 있다 발이 시린지 자주 가지를 옮겨 다닌다 나뭇가지 하나를 가는 발 네 개가 꼭 붙잡을 때도 좋아 보이지만 열매 하나를 놓고 같이 찢을 때가 가장 보기에 좋다 하늘도 보기에 좋은지 흰 눈을 따뜻하게 뿌려주고 산수유나무 가지도 가는 몸을 흔들어 인사한다 잠시 콩새 부부는 가지를 떠나고 그 자리에 흰 눈이 가는 가지를 꼭 붙잡고 앉는다 콩새 부부를 기다리다 가슴이 뜨거워진 산수유나무 열매는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그림 : 전은순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