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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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 적산가옥시(詩)/김재진 2022. 1. 5. 16:15
오랜만이야, 하고 속삭여봤다 많이 늙었내, 하며 돌아오는 소리가 복도 지나 먼지 털며 걸어 나온다 낮잠 자다 해거름에 일어나 학교 늦다고 허둥대며 가방 챙겨 뛰쳐나가던 어릴적 국민학교 운동장에 서봤다 변소에 빠진 아이를 씻어내던 수돗가에 여선생님 닮은 분꽃은 피지않고 구충제 먹듯 아득해지는 옛길 일으켜 교문 나서면 문방구 건너 이발소, 줄장미 피던 양옥집 지나 삐거덕거리는 나무계단 가파른 적산가옥 한 채 보인다 자전거 타고 귀가하던 아버지가 눈에 밟혀 열차 따라 남쪽에 온 저녁 아랫목에 묻어둔 밥그릇이 달그락거리고 이불위에 쪼그리고 앉은 늙은 소년 하나 발가락에 묻은 밥풀 떼내고 있는 옛날 살던 동네에 가봤다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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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 구두에게 물어보네시(詩)/김재진 2020. 11. 23. 17:52
한 발 건너 또 나무가 우수수 이파리를 흩날이고 있었지. 기다리던 차도 끊긴 길 위에 앉아 너는 새까만 밤하늘을 골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어. 별들이 열어놓은 창 밖으로 꽃 피듯 누군가 노래 부르는 밤이었지. 어둠이 펼쳐놓은 악보 위로 또 누가 그려넣은 시간들이 얼굴 내민 떡잎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었어. 내게 불협의 화음을 새겨넣던 너는 비어 있는 오선지야. 눈감고 나무가 뿌려놓은 음표들을 살펴봐. 바스락거리며 길 위를 굴러가는 저 계절의 수레들을 따라가봐. 고단한 음계 위로 걸어가고 있는 구두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란 말이지. 시간은 가고, 세월도 갈 거야. 우리가 걸을 수 있는 날들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나도 몰라. 사실은 아무 것도 알 수 있는 것이 없어. 눈물인지 기쁨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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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 눈오는 밤시(詩)/김재진 2018. 12. 5. 15:35
편지를 쓴다. 모처럼 하얀 종이 위에 써 보는 편지 사각거리며 걸어가는 연필심 따라 어디선가 환하게 눈 내린다 미끄러지는 사람 있는지 까르르 입을 막는 여지의 웃음소리 들린다 검은 세상의 하얀 약속들 누가 누구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시간에 몸을 담그는 거라 너는 내게 가르쳐 주었다 어느새 눈 그치고 사각거리던 편지도 마침표에 닿는다 지치도록 걸어가도 집이 보이지 않던 젊은날의 시간 아무도 몸담그지 않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편지의 말미에 얼른 여전히 사랑을 믿지 않는다 추신한다 (그림 : 신재흥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