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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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 달빛 가난시(詩)/김재진 2016. 5. 31. 21:34
지붕 위에도 담 위에도 널어놓고 거둬들이지 않은 멍석 위의 빨간 고추 위로도 달빛이 쏟아져 홍건하지만 아무도 길 위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부지, 달님은 왜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나요?" "잠이 안 와서 그런거지." "잠도 안 자고 그럼 우린 어디로 가요?" "묻지 말고 그냥 발길 따라만 가면 된다." 공동묘지를 지나면서도 무섭지 않았던 건 아버지의 눌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부지 그림자가 내 그림자보다 더 커요." '근심이 크면 그림자도 큰 법이지.' 그날 밤 아버지가 지고 오던 궁핍과 달리 마을을 빠져나오며 나는 조금도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림 : 김영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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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 기차 타고 싶은 날시(詩)/김재진 2015. 8. 29. 21:06
이제는 낡아 빛바랜 가방 하나 둘러메고 길을 나선다. 반짝거리는 레일이 햇빛과 만나고 빵처럼 데워진 돌들 밟는 단벌의 구두 위로 마음을 내맡긴다.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떠나는 친구 하나 배웅하고 싶은 내 마음의 간이역 한번쯤 이별을 몸짓할 사람 없어도 내 시선은 습관에 목이 묶여 뒤돌아본다. 객실 맨 뒤칸에 몸을 놓은 젊은 여인 하나 하염없는 표정으로 창 밖을 보고 머무르지 못해 안타까운 세월이 문득 꺼낸 손수건 따라 흔들리고 있다. (그림 : 김태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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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 기다리는 사람시(詩)/김재진 2014. 6. 2. 13:33
설령 네가 오지 않는다 해도 기다림 하나로 만족할 수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 묵묵히 쳐다보며 마음속에 넣어둔 네 웃는 얼굴 거울처럼 한 번씩 비춰 볼 수 있다. 기다리는 동안 함께 있던 저무는 해를 눈 속에 가득히 담아둘 수 있다. 세상에 와서 우리가 사랑이라 불렀던 것 알고 보면 다 기다림이다.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다. 기다리는 동안 따뜻했던 내 마음을 너에게 주고 싶다. 내 마음 가져간 네 마음을 눈 녹듯 따뜻하게 녹여주고 싶다. 삶에 지친 네 시린 손 잡아주고 싶다. 쉬고 싶을 때 언제라도 쉬어갈 수 있는 편안한 기다림으로 네 곁에 오래도록 서 있고 싶다. (그림 : 김은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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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 얼마나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시(詩)/김재진 2014. 4. 7. 14:21
문이 닫히고 차가 떠나고 먼지 속에 남겨진 채 지나온 길 생각하며 얼마나 더 가야 그리움이 보일까. 얼마나 더 가야 험한 세상 아프지 않고 외롭지 않고 건너갈 수 있을까. 아득한 대지 위로 풀들이 돋고 산 아래 먼길이 꿈길인 듯 떠오를 때 텅 비어 홀가분한 주머니에 손 찌른 채 얼마나 더 걸어야 산 하나를 넘을까. 이름만 불러도 눈시울 젖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얼마나 더 가야 네 따뜻한 가슴에 가 안길까. 마음이 마음을 만져 화사하게 하는 얼마나 더 가야 그런 세상 만날 수가 있을까. (그림 : 이영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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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 사랑의 이유시(詩)/김재진 2014. 1. 9. 16:54
당신이 꼭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당신이 완전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당신은 장점보다 결점이 두드러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당신의 결점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연인들이 그러하듯 어쩌다 보니 당신을 사랑하게 된 건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야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쉽게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는 이유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나 스스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향한 그 사랑은 결국 나를 위한 것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힘들던 마음 역시 내가 아팠기 때문입니다 (그림 : 김명숙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