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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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안정사(安靜寺)시(詩)/김명인 2013. 12. 24. 11:18
안정사 옥련암 낡은 단청의 추녀 끝 사방지기로 매달린 물고기가 풍경 속을 헤엄치듯 지느러밀 매고 있다 청동바다 섬들은 소릿골 건너 아득히 목메올 테지만 갈 수 없는 곳 풍경 깨어지라 몸 부딪쳐 저 물고기 벌써 수천 대접째의 놋쇠 소릴 바람결에 쏟아 보내고 있다 그 요동으로도 하늘은 금세 눈 올 듯 멍빛이다 이 윤회 벗어나지 못할 때 웬 아낙이 아까부터 탑신 아래 꼬리 끌리는 촛불 피워놓고 수도 없이 오체투지로 엎드린다 정향나무 그늘이 따라서 굴신하며 법당 안으로 쓰러졌다가 절 마당에 주저앉았다가 한다 가고 싶다는 인간의 열망이 놋대접풍으로 쩔렁거려서 그리운 마음 흘러 넘치게 하는 바다 가까운 절간이다 안정사(安靜寺) :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 안정리 벽발산(碧鉢山)에 있는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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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부석사(浮石寺)시(詩)/김명인 2013. 12. 24. 11:17
언 바다에 뜬 부표(浮漂)들이 꺼진 분화구 주변을 헤매는 화산석 같다 다만 절간처럼 고요한 면벽, 창 너머로도 걸어서 하늘에 이르는 길 보이지 않을 뿐 한두 점 구름에도 박히며 새들 까마득하게 난다 어떤 때는 하루종일 말 한마디 못 했음을 불일듯 노을 지펴오르는 황혼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끼니때마다 한번쯤 내다보는 발전소 높은 굴뚝과 저기 고압선 눈 쌓인 이면 도로 철탑 언저리엔 오래 전부터 바퀴 주저앉힌 군용 트럭 한 대 갈 길 다 달리고도 떠나야 할 욕망이 남는 사람은 애처롭다 문을 열고 나서면 길이야 여기서도 어디로든 뻗어 있겠지만 어느 쪽을 엿보아도 반원의 길 끝없이 휘어져 돌아설 뿐 갈 곳이 없다 다만 내 떠나지 않은 길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기차가 오고 간다, 시베리아 저쪽 지구의 끝에 맞닿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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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이별 노래시(詩)/김명인 2013. 12. 24. 11:17
잎진 숲길 지나와 그대마저 지우려 들판에 섰습니다 저녁 노을에 숨죽이는 구름 유난해도 강 건너 도시의 창들 이른 불 밝혀 한 날 저물고 있습니다 굽은 강 허리 흐려지는 배 한 척도 보입니다 세월이 왔다 간 흔적 아무데도 찾을 수 없지만 저다지 어둠에 웅크려 낯선 집들, 서로를 가두는 문들을 닫아겁니다 밤과 밤 사이로 길들여지며 켜켜의 날들, 그 부질없음으로 오한 날지라도 가는 길 더는 당신을 꿈꿔 아니 됩니다 우리 정 그러하지 아니하여 여기저기 맘 거둘 일 고통입니다 이 치욕의 세월조차 우리 몫이 아니라면 피고 지는 들풀의 철없는 보챔 왜 눈물입니까 이 땅의 임자들 아직 그대로인데 부는 바람에도 갈라쥐는 여린 피와 살, 뼈마디마다에 새기며 그대 아픈 이별입니다 (그림 : 이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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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천지간시(詩)/김명인 2013. 12. 24. 11:15
저녁이 와서 하는 일이란 천지간에 어둠을 깔아놓는 일 그걸 거두려고 이튿날의 아침 해가 솟아오르기까지 밤은 밤대로 저를 지키려고 사방을 꽉 잠가둔다 여름밤은 너무 짧아 수평선 채 잠그지 못해 두 사내가 빠져나와 한밤의 모래톱에 마주 앉았다 이봐, 할 말이 산더미처럼 쌓였어 부려놓으면 바다가 다 메워질 거야 그럴 테지, 사방을 빼곡히 채운 이 어둠 좀 봐 망연해서 도무지 실마릴 몰라 두런거리는 말소리에 겹쳐 밤새도록 철썩거리며 파도가 오고 그래서 여름밤 더욱 짧다 어느새 아침 해가 솟아 두 사람을 해안선 이쪽저쪽으로 갈라놓는다 그 경계인 듯 파도가 다시 하루를 구기며 허옇게 부서진다 (그림 : 이향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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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따뜻한 적막시(詩)/김명인 2013. 12. 24. 11:15
아직은 제 풍경을 거둘 때 아니라는 듯 들판에서 산 쪽을 보면 그쪽 기슭이 환한 저녁의 깊숙한 바깥이 되어 있다 어딘가 활활 불 피운 단풍 숲 있어 그 불 곁으로 새들 자꾸만 날아가는가 늦가을이라면 어느새 꺼져버린 불씨도 있으니 그 먼 데까지 지쳐서 언 발 적신들 녹이지 못하는 울음소리 오래오래 오한에 떨리라 새 날갯짓으로 시절을 분간하는 것은 앞서 걸어간 해와 뒤미처 당도하는 달이 지척 간에 얼룩 지우는 파문이 가을의 심금임을 비로소 깨닫는 일 하여 바삐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같은 하늘에서 함께 부스럭대는 해와 달을 밤과 죽음의 근심 밖으로 잠깐 튕겨두어도 좋겠다 조금 일찍 당도한 오늘 저녁의 서리가 남은 온기를 다 덮지 못한다면 구들장 한 뼘 넓이만큼 마음을 덥혀놓고 눈물 글썽거리더라도 들판 저쪽을 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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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저 능소화시(詩)/김명인 2013. 12. 24. 11:14
주황 물든 꽃길이 봉오리째 하늘을 가리킨다 줄기로 담벼락을 치받아 오르면 거기, 몇 송이로 펼치는 생이 다다른 절벽이 있는지 더 뻗을 수 없어 허공 속으로 모가지 뚝뚝 듣도록 저 능소화 여름을 익힐 대로 익혔다 누가 화염으로 타오르는가, 능소화 나는 목숨을 한순간 몽우리째 사르는 저 불꽃의 넋이 좋다 가슴을 물어라, 뜯어내면 철철 피 흘리는 천근 사랑 같은 것, 그게 암 덩어리라도 불볕 여름을 끌고 피나게 기어가 그렇게 스러질 너의 여름 위에 포개리라 (그림 : 이금파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