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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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후포(厚浦)시(詩)/김명인 2015. 8. 29. 12:29
바다는 조용하다 장마비 양철지붕을 후둘기다 지나가면 낮잠도 무상한 잔물결에 부서져 연변 가까이 떼지어 날아오르는 새떼들보인다, 어느새 비 걷고그을름 같은 안개 비껴 산그늘에는 채 씻기다만 버드나무 한 그루 이띠금씩 원동기소리 늘어진 가지에 와 걸리고 있다 바람은 성채(城砦)만한 구름들 하늘 가운데로 옮겨놓는다 세월 속으로, 세월 속으로, 끌고 갈 무엇이 남아서 적막도 저 홀로 힘겨운 노동으로 문득 병든 무인도를 파랗게 질리게 하느냐 누리엔 놀다가는 파도가 쌓아놓은 덕지덕지 그리움, 한 꺼풀씩 벗어야 할 허물의 쓸쓸한 시절이 네 마음 속 캄캄한 석탄에 구워진다 뼈가 휘도록, 이 바닥에서 , 너는, 그물코에 꿰여 삶들은, 모른다 하지 못하리 흉어에 엎어져도 우리 함게 견뎠던 여름이므로 키 큰 장다리 제 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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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비 오기 전에시(詩)/김명인 2015. 6. 5. 01:01
늦봄의 저녁 한 때를 나는 남방 소매 걷어올리고 허리에 고무줄 댄 짧은 반바지 입은 채 담배를 붙여 물기 위해 현관 계단에 앉아 있다 언덕길로 아이들 앞세운 젊은 부부가 손을 맞잡고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저들의 산책은 지금 집 주위를 맴돌지만 머지않아 아이들이 버리는 이 배회의 한가함을 나처럼 혼자 지키는 때가 올 것이다 누구의 가담 없이도 우리 중심은 어느 틈에 변경된다 시간을 건너지 않고서 무엇으로 우리가 늙는다 하겠느냐 아이들 재잘거림이 어스름 속으로 나직이 깔려가는 언덕 저켠에서 낮에 본 아카시아가 꽃 향기를 전해온다 나는 조금 전 내 방 서가 틈새에 놓인 해안 단애를 배경으로 여럿이서 찍은 사진을 보고 왔다 어깨 너머로 출렁거리는 수평선 저쪽으로 몇 년 전의 시선들이 꺾여 있다면 네가 바라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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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침묵시(詩)/김명인 2015. 2. 1. 20:35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가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서도 바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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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아버지의 고기잡이시(詩)/김명인 2015. 1. 5. 18:10
열목어의 눈병이 도졌는지,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나와 내 어로(漁撈)가 궁금해지신다 그러면 나, 아버지의 계류에서 다시 흘러가 검푸른 파도로 솟아 뱃전을 뒤흔드는 심해에 낚시를 드리우고 바닥에 닿는 옛날의 멀미에 시달리기도 하리라 줄을 당기면 손 안에 갇히는 미세한 퍼덕거림조차 해저의 감촉을 실어 나르느라 알 수 없는 요동으로 떨려올 때 물밑 고기들이 뱉어놓은 수많은 기포 사이를 시간은 무슨 해류를 타고 용케 빠져나갔을까, 건져 올린 은빛 비늘의 저 선연한 색 티! 갓 낚은 물고기들 한 겹 제 물 무늬로 미끈거리듯 아버지의 고기잡이는 그게 새삼 벗어버리고 싶어지신 걸까, 마음의 갈매기도 몇 마리 거느리고 바다 생살을 찢으며 아침놀 속으로 이 배는 돌아갈 테지만 살아 있음이란 결코 지울 수 없는 파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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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가을의 끝시(詩)/김명인 2014. 11. 30. 10:06
더 이상 시들 것 없는 벌판 속으로 바람이 몰려간다 풍찬노숙의 쓸쓸한 풀꽃 몇 포기 아직도 지지 못해서 허옇게 갈대꽃 함께 흔들리는 강가 오늘은 우주의 끝으로 귀뚜르르 귀뚜라미 교신하는 가을의 끝머리에 선다 또 우리가 누릴 수 없어도 날들은 이렇게 흘러가고 흘러가리라 이마에 물결치는 강굽이 바라보며 눈썹 젖으면 캄캄했던 세월만 저희끼리 추억이 되고 아픔이 되고 한다 그러므로 소리 죽여 흐느끼는 여울이여 억새 가슴에 저며 서걱이는 빈 들판에 서서 이제 우리가 새삼 불러야 할 노래는 무엇인가 저기 위안 없이 가야 할 남은 길들이 마저 보인다 그러니 여기 잠시만 멈춰서라 풍찬노숙(風餐露宿) : 바람에 불리면서 먹고, 이슬을 맞으면서 잔다는 뜻으로, 떠돌아다니며 고생스러운 생활을 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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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인 - 화엄(華嚴)에 오르다시(詩)/김명인 2014. 11. 13. 11:48
어제 하루는 화엄 경내에서 쉬었으나 꿈이 들끓어 노고단을 오르는 아침 길이 마냥 바위를 뚫는 천공 같다, 돌다리 두드리며 잠긴 산문(山門)을 밀치고 올라서면 저 천연한 수목 속에서도 안 보이는 하늘의 운판(雲板)을 힘겹게 미는 바람소리 들린다 간밤에는 비가 왔으나, 아직 안개가 앞선 사람의 자취를 지운다, 마음이 구절양장(九折羊腸)인 듯 길을 뚫는다는 것은 그렇다, 언제나 처음인 막막한 저 낯선 흡입 묵묵히 앞사람의 행로를 따라가지만 찾아내는 것은 이미 그의 뒷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엇이 이 산을 힘들게 오르게 하는가 길은, 누군들에게 물음이 아니랴, 저기 산모롱이 이정표를 돌아 의문부호로 꼬부라져 우화등선(羽化登仙)해 버린 듯 앞선 일행은 꼬리가 없다, 떨어져도 떠도는 산울림처럼 이 허방 허우적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