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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이 세상에 올 때
얼마나 무작정 오는지 비에게 물어볼 수 없고
모르긴 해도 빈 몸으로 오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오면서 생각하니 급했던지
다 와서는 냅다 세상의 가슴팍을 때리고 걷어차고
다그친다 무엇을 내놓으라고 저렇게 퍼붓나
내가 비의 애인을 숨긴 것도 아닌데
쏟아붓는다 들이친다
하다가 안 되니까 제 몸을 마구 패대기친다
어쨌든 들어오시라
나는 수문을 열고 비의 울음을 모신다
비의 물고기들이 물밀 듯 밀려들어온다
방 안 가득히 차오르는 빗소리
인사불성 표류하는 비의 구절들
비는 이미 만취가 되었으므로
비가 들려주는 시, 비가 부르는 노래를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
다만, 그래 그래 알았어, 그래 괜찮아
하면서 달랜다, 비의 등을 다독인다
그새 얼마나 울었는지 비의 눈이 퉁퉁 부었다
밤낮을 바꾸어 추적추적 지친 음성으로 내리던
비가 차츰차츰 멎나 보다
비는 멈출 때 느리고 무겁고 흐느끼는 소리를 낸다
젊은 비는 저런 구음을 낼 수 없으리라
비도 마지막엔 늙는가
죽은 저 빗소리들 늘 내 곁을 떠돈다
(그림 : 최양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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