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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현 - 블루스의 리듬시(詩)/시(詩) 2023. 6. 11. 15:32
높이 던진 공이 잠시 멈추었다 빠르게 낙하하는 리듬으로 우리는 블루스의 리듬을 그런 식으로 배웠지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질 때 붕, 떠오르는 감각보다는 잠시 멈춘 뒷모습만이 기억나는 블루스의 춤곡, 춤곡의 리듬 음악으로 위로받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 하지만 그러지 않기 위하여 밤을 새던 우리의 기쁘던 나날을 기억하는지 "너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해줘" 함정에 빠지기 일쑤였으므로 음악은 불길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물류센터에서 일하고 돌아와 어젯밤의 노래를 다시 만지는, 그러나 대부분은 실패를 거듭하는 생활 너는 어둠 속에 앉아 스노볼을 흔드네 슬픔도, 회한도 아닌 그 무엇이 섞여 내리네 저녁도, 새벽도 아닌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블루스의 리듬 같은 건 잊어버리네 물속인 걸 모르는 물고기처럼 매일 저녁 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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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열 - 담쟁이시(詩)/시(詩) 2023. 6. 7. 09:14
산다는 것이 무모한 도전과 집착인지 모른다 널 부러진 파지더미 뒹구는 플라스틱 바가지와 라면봉지 사이 고양이 사체가 썩고 있는 어둡고 칙칙한 도시의 변두리 누구나 가지 않는 쓰레기더미를 지나 세상의 높은 담장을 향해 기고 또 기었다 차가운 벽에 달라붙어 정상을 향해 악착같이 기어오르는 무용한 놀음 세찬 비바람에 몇 장의 이파리는 도중에 떨어지고 추억처럼 초록빛이 잠시 반짝이기도 한다 높은 곳의 생(生)도 위태롭긴 마찬가지 그 불안을 떨치기 위해 스크럼을 짜며 오를 수밖에 없는 쟁이들의 업보! 콘트리트 블록에 발톱을 단단히 박고 담장 옆 전봇대를 향해 위험한 한발 또 뻗는다 (그림 : 손순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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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천 - 햇빛 한 줌시(詩)/시(詩) 2023. 6. 7. 09:01
시간이 이렇게 흐르는구나. 멀리서 온 너의 편지에는 함께한 이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구나. 녹아내린 글자들 오랜 시간을 건너오느라 힘들었구나. 힘들게 적어 내려간 마음 하나하나를 차마 보지 않을 수 없구나. 그런데 어쩐 일일까? 편지를 읽을수록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은 헤어날 수 없는 구렁은 이렇게나 외롭구나. 유월의 햇볕은 게나예나 뜨겁다. 나무는 하루가 다르게 가지를 뻗고 나는 더 자라고 싶지 않다. 자랄 수가 없다. 잎 사이로 흔들리는 햇빛을 보고 있자니 열일곱 내가 보이고 서른을 넘어서도 불안했던 시절이 있다. 익숙한 눈빛이 그래서 좋구나. 저녁의 감정은 이래서 기쁘기도 하구나. 그런데 깊은 밤 잿더미 속에 불씨를 감추어야 하는 나이는 부끄럽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가더라. 참혹한 일을 언제나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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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섭 - 강은 전생을 기억할까시(詩)/이홍섭 2023. 6. 1. 13:39
어디 마음 둘 데 없을 때 쪼그려 앉아 흘러가는 강물이나 바라보는 것은 강이 자신의 전생을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거야 마음 둘 데 없다는 것은 지금 내가 현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두 발로 서 가는 사람에게나 외발로도 서 있는 나무 밑에 가 울고 있겠지 쪼그려 앉아 얼굴에 물때가 끼일 때까지 앉아 있는 것은 강의 전생에 위로 받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무심하게 흘러가는 저 강물에 위로받을 수 있을까 큰 홍수가 나면 알지 강물은 자신이 기억하는 길을 따라 달려가고 길을 막으면 그 자리에서 한 생을 걸고 범람한다는 것을, 강이 휘어 흐르는 것은 다 전생이 아프기 때문일 거야 어디 마음 둘 데 없더라도 해질 무렵에는 강가에 나가지마, 강의 전생이 아니 너의 전생이 붉은 노을 속에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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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숙 - 꽃들의 향방시(詩)/시(詩) 2023. 5. 26. 09:45
그녀의 향방은 가늠키 어려웠다 언제 어디로 팔려 갈지 어느 손에 이끌려 갈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하루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때때로 손님의 구미에 맞도록 먼 데로부터 공수해 오기도 했다 별처럼 헤아릴 수 없는 그녀의 언어는 밤새 시들지 않고 빛나고 있었지만 금세 또 지고 마는 공허한 속삭임이었다 그녀의 보랏빛 꿈은 이미 은하수에 보관되었으므로 다시 꺼내오기엔 역부족이었다 오늘밤에도 그녀들은 바람의 소식에 귀를 귀울인다 (그림 : 성하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