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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현 - 내 가난한 몸 들일 초가삼간 지어볼라네시(詩)/시(詩) 2023. 4. 24. 19:50
산돌 몇 개 지고 와 주초로 놓고 한세상 고달파 나이테 촘촘한 놈 골라 튼실한 뿌리 쪽에 그랭이 떠서 기둥으로 세워두고 새들의 부리로 쪼은 화통가지에 뒤틀렸어도 우듬지에 새집 몇 개쯤 세주고 살아온 허리 굵은 대들보는 생긴 대로 치목해 앉혀놓겠네 권세니 명예는 없으니 대충 휘어진 서까래는 나이 따위는 잊고 돌려가며 쓰다 보면 초승달 놀만하거나 박 몇 개 달릴 지붕이 될 걸세 건너 산비알 황토 몇 지게에 볏짚 섞어 벽을 바르고 처마 끝 햇살이 마룻장을 덮으면 흙 묻은 손으로 다관(茶罐)에 차 한잔하세 내 가난하니 국화정이나 철물 문고리 대신 가죽 손잡이 달아 놓고 아궁이 가득 장작 넣어 놓을 터이니 그대 기별 없이 찾아와 다래주(酒) 한 동이 다 드시고 가시게 이제 빗소리 듣고 싶어 양철지붕을 덮을까 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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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희 - 칠월 칠석시(詩)/시(詩) 2023. 4. 24. 19:45
내가 먼저 가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어 너 혼자 남을 생각 하면 자다가도 벌떡증이 일어나 나이 사십에 옆댕이서 젖 만져줄 놈 하나 없는데 코 골고 자는 모습 보면 안스럽기도 하고 성질도 나고 내가 니 아비 먼저 보내놓고 사방의 온 병 끌어모아 이 고생인데 안 봐도 비디오여 나 가고 나면 가슴 쥐어짜고 살 텐가 내가 그 꼴을 저승 가서 어찌 보겠냐 아, 견우직녀도 매년 새 대가리 밟고 손모가지 붙잡는데 너도 아무 놈 손모가지라도 끌고 와 그래야 내가 편히 눈감어 온 몸이 종합병원인데 너는 어찌 어미 맘을 모르냐 뭣 모르고 대가리 벗겨진 콩처럼 튈 궁리만 하고 앉아 있고 사는 게 별 거 아니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니 너도 대 가리 그만 굴리고 나가서 한 놈만 잡아와봐 그러면 어찌 아 냐 저승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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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 유리에게시(詩)/시(詩) 2023. 4. 20. 17:03
네가 약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작은 충격에도 쉬이 깨질 것 같아 불안하다 쨍그랑 큰 울음 한번 울고 나면 박살난 네 몸 하나하나는 끝이 날카로운 무기로 변한다 큰 충격에도 끄떡하지 않을 네가 바위라면 유리가 되기 전까지 수만 년 깊은 땅속에서 잠자던 거대한 바위라면 내 마음 얼마나 든든하겠느냐 깨진다 한들 변함없이 바위요 바스러지다 해도 여전히 모래인 것을 그 모래 오랜 세월 썩고 또 썩으면 지층 한 무늬를 그리며 튼튼하고 아름다운 다시 바위가 되는것을 누가 침을 뱉건 말건 심심하다고 차건 말건 아무렇게나 뒹굴어다닐 돌이라도 되었다면 내 마음 얼마나 편하겠느냐 너는 투명하지만 반들반들 빛이 나지만 그건 날카로운 끝을 가리는 보호색일 뿐 언제고 깨질 것 같은 너를 보면 약하다는 것이 강하다는 것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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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규 - 우리 동네 이야기시(詩)/시(詩) 2023. 4. 20. 12:33
마흔 해 훌쩍 넘도록 살고 있는 동네 안면 터서 수인사하고 호형호제하던 사람들 이제는 눈 닦고 찾아보아도 없고 아이들 떠드는 소리마저 끊어진 지 오래 엎어지면 코 닿는 자리의 가게도 문을 닫았다. 늘 헐빈하게 비어 다니는 버스 타고 내리던 사람들 지키는 연쇄점 이젠 방수나 집수리 한다는 간판으로 바꿔달고 귀밑머리 새파란 새댁이 열었던 분식집 한 평이 채 될까 말까한 비좁은 곳 라면 국수 김밥도 말아 팔고 비 구죽죽이 오는 날은 노인네들 모여 정구지전 부쳐 막걸리로 주전부리도 했는데 문 닫고 어디로 갔는지 소식조차 감감하고 속절없이 물기 다 날아가버린 장작개비로 마흔 해 넘겨가면서 살고 있는 동네 (그림 : 박지오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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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진 - 겉절이시(詩)/시(詩) 2023. 4. 20. 12:25
어느 현장에서 품을 팔았는지 낡은 봉고차가 식당 앞에 한 무더기 일당쟁이를 부려놓는다 땅거미가 하루의 노동에서 건져낸 저들을 척척 국숫집 의자에 걸쳐놓으면 시멘트 바닥으로 주르륵 흐르는 노을 하얀 거품을 저녁의 가장자리로 밀어내며 국수가 삶아지는 동안 그들은 종일 다져온 양념으로 서로를 버무린다 잘근잘근, 오늘의 기분을 씹으며 겉절이 한 잎을 반으로 찢는다 너무 길거나 폭이 넓은 슬픔은 적당한 어디쯤 젓가락을 쑤셔 넣고 주욱 찢어야 비로소 먹기에 알맞은 크기가 된다 반쯤 숨이 죽은 배춧잎처럼 하루가 치대는 대로 몸을 맡겼다가 국수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 아직은 어디에라도 곁들여지고 싶은 절여진 겉들 (그림 : 이용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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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관용 - 아지랑이꽃시(詩)/시(詩) 2023. 4. 20. 12:18
아지랑이꽃 피는 4월의 지평선 향해 걸어갑니다. 남들은 자동차 놔두고 구두나 닳게 하는 뜬구름 내 행로에 이른 봄부터 개나리꽃 활짝 피우지만 나는 아지랑이꽃이라도 꺾기 위해 아내의 출근길 반대편으로 소풍 갑니다. 주머니에 피우다만 꽁초와 라이타 그 외에 더 이상 친구도 없이 걷고 또 걸어 아지랑꽃 핀 아득아득한 지평선 향해 가출합니다. 가다가 지치면 길바닥에 주저앉아 피우다만 꽁초의 마지막 생애까지 모두 태우고 밤이슬 눈썹에 맺히면 산속에 쓰러져 사나운 꿈 꿉니다. 꿈속에서도 지평선의 아지랑이꽃 따라 산을 넘고 강을 건너갑니다. 흥, 표독스런 암코양이들을 만나 이내 꿈속에서도 쫓겨납니다. 방황하는 수많은 밤하늘의 별들 봅니다. 저 아름다운 별들이 이유 없이 내 눈속으로 익사하는 모습 봅니다. 아지랑이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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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진 - 따뜻한 반어법시(詩)/시(詩) 2023. 4. 18. 12:11
다음 해, 꽃이 피면 당신의 셔츠 당신의 벨트 당신의 구두를 잊을 거야 오래된 주소 즐겨 쓰던 형용사와 편지 속의 마침표를 꼭 잊을 거야 더 이상 당신을 감출 행간이 없으므로 눈동자를 잊고 눈물을 덮던 눈꺼풀도 잊어버리고 나면 당신이 사라지는 것과 기억이 사라지는 것 중에서 어는 쪽이 더 슬픈 일이 될까 잊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슬픈 기억들 어두운 꽃송이 아래서 잊고 또 잊으면 나의 하루는 터무니없이 행복해지고 나비들이 죽는 계절에는 꽃을 잊은 채 이별에도 희망을 걸 수 있게 될까 다음 해 기다리지 않아도 꽃이 돌아와 꽃이 피는 날 나는 어떻게 해야 그 꽃을 알아보지 못할까, 천만다행으로 (그림 : 안기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