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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휼 - 여기 보세요시(詩)/시(詩) 2023. 3. 29. 08:28
산 그늘 내려오는 숲길에 앉아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무들 물 삼키는 소리 연둣빛 가쁜 숨소리에 가슴이 뛰는 계절 찔레꽃 꽃 진 자리에 그리움이 커가는데 그대는 잘 있는지요 봄 햇살 깊게 스미는 그곳에 몸빛 고운 영산홍 몸을 열어 보이고 성급한 낮달 머쓱하여 돌아앉는 해거름 먼 데서 흘러온 구름에 마음을 실어봅니다 지금 돌아갈 길에는 조용히 흘러내리는 노을 그리움은 얼마나 긴 목을 가졌는지 그대여, 물이 괸 곳에 물안개 피거든 끄지 못한 내 마음인 줄 아세요 (그림 : 장태묵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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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경 - 가능한 행복시(詩)/시(詩) 2023. 3. 29. 08:21
이 세계는 내가 발명한 거야 한 번도 잠든 적 없는 것처럼 가만히 눈을 뜨면 내가 나를 사라지게 하기도 하고 나타나게 하기도 하지 내가 사라지는 건 엄마에겐 아픔일 수도 있겠지만 엄마도 가끔은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었을 거야 모두를 내려놓으면 슬픔이 사라질까 걸어도 걸어도 국경은 멀지만 희망은 곧 체념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 그런 생각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누군가 말했지만 그러면 어때 그따위 고상한 말들 어차피 내겐 사치였어 행복과 불행, 그 사이의 다행처럼 오늘은 햇살이 골고루 비쳤어 햇살은 아무도 포기하지 않아 오늘 밤엔 별이 뜨는 쪽으로 걸어갈 거야 아무도 모르게 (그림 : 류신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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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친구야, 나는......시(詩)/김상미 2023. 3. 25. 13:06
친구야, 나는 너희들이 좋단다 문 가까이 귀를 너무 바짝 대지 마 때로는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마음 베일 때도 있으니 내가 좋아하는 너희들의 지적 조심성으로 똑 똑 똑 두드리기만 해 그럼 나 문 열어줄게 문 안의 활력 다 보여줄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사시사철 뜨겁게 찻물 데워놓을게 우린 자꾸 나이들고 틀 속에 갇힐 때가 잦아지지 반쯤은 눈을 뜬 채 악몽을 꾸기도 하지 산발적인 쾌감을 때문에 아무 곳으로나 칼을 던지기도 하지 그러나 라일락 향기 밑이나 노랗게 은행나무 눈부시게 노래하는 길목에선 꼬옥 손을 잡지 숨지 마 돌아서지 마 당당히 당대의 핏줄답게 함께 걸어가자꾸나 나는 너희들이 좋단다 주머니 속에 꼭꼭 숨긴 은장도 나 빼앗지 않을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너희들의 앞가슴 절대 넘보지 않을게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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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공수래공수거시(詩)/김상미 2023. 3. 25. 13:00
마음 내려놓고 싶다 해와 달 떠오르는 곳에 꽃 피고 꽃지는 곳에 바람에 우우우 창 흔들리는 곳에 사람과 사람 사이 환유하는 속삭임 속에 마음 내려놓고 싶다 흐르는 물 한 방울에도 집히는 중심 속에 두 갈래 길목에서 고개 드는 지혜속에 마주 오는 사람이 내뿜는 세월 속에 귀에 익은 노랫가락 첨예한 빗방울 속에 마음 내려놓고 이 세상 땅끝까지 태워버릴 것 같던 마음 내려놓고 퍼런 뒷짐이나 지고 싶다 공수래공수거 팔자걸음으로 천하에 배은망덕 팔자걸음으로 (그림 : 차수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