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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관 - 메밀냉면시(詩)/시(詩) 2023. 3. 17. 08:37
겨울을 먹는 일이다 한여름에 한겨울을 불러와 막무가내 날뛰는 더위를 주저 앉히는 일 팔팔 끓인 고기 국물에 얼음 띄워 입안 얼얼한 겨자까지 곁들이는 일 실은 겨울에 여름을 먹는 일이다 창밖에 흰 눈이 펄펄 날리는 날 절절 끓는 온돌방에 앉아 동치미 국물에 메밀국수 말아 먹으니 이야말로 겨울이 여름을 먹는 일 겨울과 여름 바뀌고 또 바뀐 아득한 시간에서 묵은 맛은 탄생하느니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 깊은 샘에서 솟아난 담담하고 슴슴한 이 맛 핏물 걸러낸 곰국처럼 눈 맑은 메밀맛 그래서일까 내 단골집 안면옥은 노른자위 땅에 동굴 파고 해마다 겨울잠 드는데 냉면은 메밀이 아니라 간장독 속 진하고 깊은 빛깔처럼 그윽하고 미묘한 시간으로 빚는 거라는 뜻 아닐는지 안면옥(부산 안면옥) : 대구 중구 국채보상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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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흠 - 목련시(詩)/이대흠 2023. 3. 15. 10:33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애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을 연꽃으로 모시지 않으면 어떻세 견딜 수 있으랴 한때 내 그리움은 겨울 목련처럼 앙상하였으나 치통처럼 저리 다시 꽃 돋는 것이니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로 놓아두고 맺히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려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그림 : 한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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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발자취시(詩)/천양희 2023. 3. 7. 16:18
사람이 무서운 건 관계 때문이고 관계가 힘든 건 마음 때문이라는 문장을 읽었을 때 한 구절 한 구절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내게로 왔다 발자취를 생각한 건 그때부터였다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은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붉은 문장을 이해한 건 혹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때였다 사랑과 인식의 출발에 눈을 뜬 건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는 문장을 지운 뒤였다 한 사람의 마음도 살리지 못하면서 관계의 소통과 유대에 대해 말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닻을 내린 건 귀가 순해진 뒤였겠지 그때 비로소 나는 사람이 궁금한 사람이었고 마침내 나는 사람이 힘든 사람이란 걸 알았다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길이보다 깊이를 생각하는 새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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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오 - 조금 늦게시(詩)/하종오 2023. 2. 23. 06:56
올해엔 지난해보다 조금 늦게 매화꽃이 피었다 이런 관찰은 나의 시간과 매화꽃의 시간이 똑같이 흘러간다는 상식에서 비롯되었지만 매화꽃은 나의 시간과는 다른 누구의 시간에 제 시간을 맞추었을까 무엇의 시간에 제 시간을 맞추었을까 올해엔 지난해보다 조금 늦게 핀 매화꽃을 보면서 매화꽃의 시간에 맞춘 누구의 시간이 나의 시간에 맞추지 않았는지 무엇의 시간이 나의 시간에 맞추지 않았는지 여러모로 생각한다 나는 나의 시간을 누구의 시간에 맞춰야 할까 나는 나의 시간을 무엇의 시간에 맞춰야 할까 나는 나의 시간을 매화꽃의 시간에 맞춰야겠다 그러면 나의 시간은 누구의 시간에도 맞고 무엇의 시간에도 맞아서 모두가 조금 늦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림 : 오견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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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운 - 편지에 대해 편지 쓰는 사람을시(詩)/시(詩) 2023. 2. 23. 06:44
지나가버린 편지. 이미 쓴 편지. 못 건넨 편지. 너는 훗날 수신인을 되살려내 그제야 편지를 건네려다가도 문득 망설이지. 편지의 내용과 달라져 있는 네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변화했는지. 이제 너는 그 마음에 대해서 또한 썼다. 편지에 대해 편지 쓰는 사람이 되어서. 편지의 편지를. 편지 쓴 순간부터 서서히 변화해온 것들에 대해서. 그렇게 두 편지를 나란히 놓고 바라보고 있지. 이제는 순서를 거꾸로 해서 읽어보고. 또 되풀이해서. 그 사이에서 어떤 감정이 생겨날까. 편지. 너는 물성과 상실에 대해서 생각해. 두 편지를 접어 패를 섞듯 섞었지. 너는 오래 눈 감은 채 두 편지를 바라보았다. (그림 : 최정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