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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진 - 청국장시(詩)/시(詩) 2023. 3. 25. 12:35
울 할매, 시골장터 책방에 들러 사온 전과지도서 내게 건네시면서 얘야, 오늘 말이다 이 책장(冊張) 위로 가게 심장처럼 품에 안고 십리 길 걸어 왔단다 안 그러면, 책속에 잠자던 말들 저 아래로 다 새어 개울물 가재 밥이 되어 배고픈 우리 새끼 어쩌라고 당신 넓적다리 내 까까머리 베개로 내주시고 구운몽 장화홍련 홍길동전 병풍처럼 둘러치고 전과지도서에 담긴 그들의 명사며 동사며 토씨를 재미나게 차례차례 불러내 내 가슴 배불렀고 내 머리 감겼다 울 할매, 군불에 따끈한 아랫목 청국장처럼 구수한 이야기 들려주기 위해 이들 영상들을 당신이 사온 전과지도서에 담가 두신 것이다 나는 시 쓰는 세간 살림들을 울 할매처럼 내 가슴 내 머리에 빼곡히 새겨두었다가 막상 시 쓰려고 모니터 앞에 앉으면 모두가 개울물 가재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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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 - 나무의 목소리를 듣는다시(詩)/시(詩) 2023. 3. 25. 12:26
- 말들의 풍경 나무의 목소리를 듣는다 빗방울, 툭 나무의 어깨에 내려앉는 순간 숲의 노래를 듣는다 바람이 숲의 울대를 간지럽히며 지나는 순간 나뭇잎이 후두둑 소리를 낸다 나뭇잎이 소리를 내기 전까지 빗방울의 목소리가 어떤 것인지 나는 몰랐다 숲이 온몸으로 운다 숲의 육체가 없었다면 나는 바람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으리 빗방울이 떨어진다 빗방울 하나 텅 빈 강당처럼 나를 울린다 세상에 저 혼자 소리를 내는 건 없다 내 눈물이 빗방울에게 말을 건넨다 비바람 불어와 나의 내부를 노래한다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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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혁 - 여수에서시(詩)/시(詩) 2023. 3. 23. 11:47
당신을 당겨서 만든 감정이 아득할 때 당신이 아직이 아니고 다음이 아닐 때 나는 여수에 간다 여수에 가면 동백은 하나의 단위가 된다 "두 동백 정도는 보고 가야지 오동도 바람은 꼭 세 동백 같아" 사람들은 빨갛게 말한다 당신을 혼자 두고 와 어제는 여섯 동백을 걸었다 갓김치의 알싸한 맛에 당신의 슬픔을 베고 한 다섯 동백 잤으면 당신의 뒤를 바다에 새기며 향일암 일출을 기다린다 동백 동댁 모여드는 눈동자들은 붉어서 좋다 오늘 아침에는 너무나 생생한 붉음의 윤곽 안에서 일곱 동백 울었다 (그림 : 한부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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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첫사랑시(詩)/이재무 2023. 3. 17. 21:05
어둠이 빠르게 마을의 지붕을 덮어 오던 그해 겨울 늦은 저녁의 하굣길 여학생 하나가 교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마을의 솔기가 우두둑 뜯어졌다. 풀밭을 흘러가는 뱀처럼 휘어진 길이 갈지자걸음을 돌돌 말아 올리고 있었다. 종아리에서 목덜미까지 소름 꽃이 피었다. 한순간 눈빛과 눈빛이 허공에서 만나 섬광처럼 길을 밝히고 가뭇없이 사라졌다. 수면에 닿은 햇살처럼 피부에 스미던 빛 고개 들어 바라본 하늘엔 밤의 상점처럼 하나둘씩 별들이 켜지고 산에서 튀어나온 새 울음과 땅에서 돋아난 적막이 길에 쌓이고 있었다. 말없이 마음의 북 둥둥, 울리며 걷던 십 리 길 그날을 떠나온 지 수 세기 몸속엔 홍안의 소년 두근두근, 살고 있다. (그림 : 한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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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 소년이었을 때 나는시(詩)/이재무 2023. 3. 17. 20:57
소년이었을 때 나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하모니카를 불었지 이웃 마을 소녀를 그리워하며 소년이었을 때 나는 밤길을 걸으며 휘파람을 불었지 이웃 마을 소녀와의 만남을 꿈꾸며 소년이었을 때 나는 가끔 하늘을 우러러봤지 이웃 마을 소녀의 웃는 소리가 들린 듯해서 나이 들어 나는 초로의 노인이 되었네 그리움도 사랑도 까마득한 옛일이 되어버렸네 하지만 꽃 피는 봄 초록 무성한 여름 홍엽의 가을 눈 내리는 겨울 사물들은 수시로 나를 검문한다네 갓 낳은 새알처럼 두근거리는 감정을 벌써 잊었느냐고 (그림 : 한영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