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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구 - 열여덟 별에 가둔 그리움시(詩)/시(詩) 2023. 2. 15. 08:34
지쳐 시간도 잠든 기억 속에서 우두커니 그리움 하나 서 있다 우주의 강은 빅뱅부터 빛으로 흐른다는데 나의 그리움은 그 강 어느 점에나 서 있는 걸까 은밀하게 감춰 놓은 골목을 벗어 나와 보고픈 얼굴 살짝 내밀고 모퉁이 돌아서며 쥐여 준 풋풋한 연서 새워 가며 애간장 녹였을 그 절절함이 찌릿 손끝으로 전해 와 온통 황홀하였다 찰랑찰랑 열여덟 별에 가둔 그리움 우주의 강은 빅뱅부터 빛으로 흐른다는데 그 그리움은 시방 어디쯤에나 서 있는 걸까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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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졸업시(詩)/김사인 2023. 2. 13. 10:29
선생님 저는 작은 지팡이나 하나 구해서 호그와트로 갈까 해요 아 좋은 생각, 그것도 좋겠구나. 서울역 플랫폼 3과 1/4번 홈에서 옛 기차를 타렴. 가방에는 장난감과 잠옷과 시집을 담고 부지런한 부엉이와 안짱다리 고양이를 데리고 호그와트로 가거라 울지 말고 가서 마법을 배워라. 나이가 좀 많겠다만 입학이야 안되겠니. 이곳은 모두 머글들 숨 막히는 이모와 이모부들 고시원 볕 안 드는 쪽방 뒤로 한 블록만 삐끗하면 달려드는 ' 죽음을 먹는 자들 '. 그래 가거라 인자한 덤블도어 교장 선생님과 주근께 친구들 목이 덜렁거리지만 늘 유쾌한 유령들이 사는 곳. 빗자루 타는 법과 초급 변신술을 떼고 나면, 배고프지 않 는 약초 욕 먹어도 슬퍼지지 않는 약초 분노에 눈 뒤집히지 않는 약초를 배우거라. 학자금 융자 없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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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욱 - 고백시(詩)/시(詩) 2023. 2. 13. 10:19
모두 잊는다 해도 기계 소리 때문에 들리질 않아요 공장 라인에서 그녀가 말한다 해도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허공이라도 기억합니다 기억했다가 어느 외롭고 쓸쓸한 날에 어디에선가 나무가 속삭여줄 거예요 오오! 사랑한다고 모조리 묻혀도 물소리 때문에 안들려도 변두리 여인숙 욕실에서 그녀가 말한다 해도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콘크리트 벽이라도 기억합니다 기억했다가 추운 겨울 웃풍에 싸늘히 식은 알루미늄 섀시에 소스라쳤다가 오오! 따끈한 살갗에 안도하듯 어느 스산한 골목 삭풍이 뒷덜미를 서늘하게 할 때 웬일인지 온통 실내가 새카만 돼지갈빗집에서 새어나온 훈풍처럼 귀에 따스한 입김이 되어 스밀 거예요 사랑한다고 (그림 : 이광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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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호 - 별어곡역시(詩)/전윤호 2023. 1. 30. 11:17
지금 여기서 나와 헤어진다 싸락눈 내리는 적당한 이별의 온도 울지도 말고 웃지도 말고 그저 가슴께 높이까지만 손을 들어 잘 가라 다시 오지 마라 어디 먼 데 가 따숩게 살거라 추위에 지친 널 보내고 빙판길로 이어진 새로운 겨울 속으로 아주 들어간다 별어곡역 : 정선 남면에 가면 '별어곡(別於谷)'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마을의 이름이 별어곡입니다. 우리말로 풀면 "이별하는 골짜기"입니다. 그리고 그 마을에 무인역(無人驛)인 '별어곡역'이 있지요 원래 이 마을의 이름은 별암(鼈巖), "자라바위"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마을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놈들이 "鼈巖"이라는 한자가 너무 어려워서 별어곡(別於谷)으로 고쳐 쓴 것이라는데요... 소가 뒷걸음치다 쥐잡을 격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별암보다는 별어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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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명 - 겨울시(詩)/시(詩) 2023. 1. 30. 06:17
그때 너와 나는 인사를 나누는 잘못을 한 것 같고 겨울이 오는 잘못을 한 것 같다. 겨울이 오면 우리는 잊었던 잘못을 한다. 거리에 서서 거리를 나란히 걸으면서 계속 똑같은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잘못을 좋아한다. 그러면 우리와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너와 나는 조금 미친 것 같은 말을 햇살이 비친다는 말을 한 것 같다. 해가 짧아지는 충동적인 나무 옆에 처음으로 말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몰아내지 않으면 우리를 둘러싼 이 짙은 안개가 물러날 것이다. 그때 너와 나는 여기저기 생겨나는 안개처럼 보일 것이다. 다가오는 것인지 멀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건물들이 터무니없이 안개 속에 너무 깊이 박혀 있는 듯 보일 것이다.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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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 다저녁때 내리는 눈시(詩)/이상국 2023. 1. 30. 06:13
다저녁때 눈 온다 마을의 개들이 좋아하겠다 아버지는 눈 오는 날 피나무로 두리반을 만들거나 손바닥에 침을 뱉어가며 멍석을 맸다 술심부름 갔다 오는 아이처럼 겅충겅충 가로등 아래 눈 온다 주전자가 좋아하겠다 아버지는 어느 해 겨울 그 멍석으로 기어코 당신의 문상객을 맞았다 눈은 아무것도 모르고 와 공평하게 마을의 지붕을 덮는다 불빛 화안한 창들 지저분한 나라도 좋아하겠다 눈은 천방지축 어둑한 골목길로 돌아다닌다 눈은 자기가 눈인 줄도 모르지만 눈에게도 고향이 있어서 거기 가서 내리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림 : 장용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