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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덕 - 시절인연시(詩)/시(詩) 2023. 1. 2. 06:50
억새꽃 일렁이는 산머리에 어느덧 황혼 생각은 깊어지고 기억은 희미해지고 내 곁을 스쳐간 이름들이 하나씩 지워지고 오래오래 내 곁에 머물기 바랐지만 결국은 스쳐 지나갈 뿐인 인연들 모두가 어제 같은데 꽃 지고 잎 떨어진 들길 같았어 그대와 같이 식탁에 마주앉아 하나의 꼭짓점, 같은 방향으로 바라보았지 황혼의 행복을 꿈꾸며 서로를 다독였지 희미해져가는 실눈을 뜨고 실실 웃었지 눈물 나게 좋아 웃던 그 순간도 티격태격 어긋났던 그 순간도 서로를 위해 자기를 버렸던 순수한 그 감정도 살아내기 위한 순간이었을 뿐 잊혀져간 이름, 가끔 생각나는 이름 지금 내 옆에 있는 그대 결국은 홀로, 홀로 산머리 넘어 떠나야겠지 (그림 : 김태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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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휘 - 탈춤시(詩)/시(詩) 2023. 1. 2. 06:44
마스크가 눈에 익으면 맨얼굴이 탈이 돼요 거리마다 탈 쓴 사람들이 걷고 있어요 그게 마치 탈춤 같아서 나도 신명이 나죠. 몇 번을 만났든 상관없어요. 어차피 서로 정체는 알 수 없죠. 실은 알아도 모른 척하는 게 이 세계의 불문율이래요. 입을 닫아야 하죠. 그러니 진짜 목소린 숨기고 숨긴 뒤엔 어디엔가 묻어두고선 거리로 나와 춤을 추겠죠. 그땐 이름 모를 유행가가 나올 거고요. 다들 어깨를 들썩이며 흥을 낼 거예요. 아무도 모르게. 누가 누구인지,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정체를 밝히기 위해 우린 정체를 숨겨야 하죠. 그래야 더 신이 난대요. 그러니 마스크를 끌어 올릴 수밖에는 없어요. (그림 : 이지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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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만 - 1월의 아침시(詩)/허형만 2023. 1. 2. 06:34
세월의 머언 길목을 돌아 한줄기 빛나는 등불을 밝힌 우리의 사랑은 어디쯤 오고 있는가. 아직은 햇살도 떨리는 1월의 아침 뜨락의 풀뿌리는 찬바람에 숨을 죽이고 저 푸른 하늘엔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살아갈수록 사람이 그리웁고 사람이 그리울수록 더욱 외로워지는 우리네 겨울의 가슴, 나처럼 가난한 자 냉수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깨끗해진 두 눈으로 신앙 같은 무등이나 마주하지만 나보다 가난한 자는 오히려 이 아침 하느님을 만나 보겠구나. 오늘은 무등산 허리에 눈빛이 고와 춘설차 새 잎 돋는 소리로 귀가 시린 1월의 아침 우리의 기인 기다림은 끝나리라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땅도 풀리고 꽃잎 뜨는 강물도 새로이 흐르리라 우리의 풀잎은 풀잎끼리 서로 볼을 부비리라. 아아, 차고도 깨끗한 바람이 분다 무등산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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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원 - 자명종시(詩)/시(詩) 2022. 12. 29. 08:37
스스로 우는 이 시계는 어쩐지 자명하다 자명한 이치처럼 자명해서 그 울림이 맑고 깊어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도 자명한 일이라지만 생각만으로도 벌써 이제 막 빛이 번지기 시작한 어느 호수 언저리처럼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자명한 일이어서 나는 오늘도 이 자명종을 내가 원하는 시간에 맞춰놓고 일을 하거나 잠시 기지개를 펴기도 하며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원하는 시간에 자명종을 맞춰 놓으면 갑자기 지금 이 시간으로부터 그 시간까지 하나의 긴 문장이 적히기 시작하는 것 같고 나는 이제부터 그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문장에 형광색 밑줄을 천천히 긋기 시작하는 것 같아 자명종 미리 정해 놓은 시각이 되면 저절로 소리가 울리도록 장치가 되어 있는 현대의 종아 커다란 종도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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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 미완의 꿈시(詩)/시(詩) 2022. 12. 29. 08:32
유혹은 달콤하여 미끼와 바꿔버린 물고기의 생이 잠깐, 허공에서 팔딱거렸다 더는 나아갈 수 없는 길 끝 탈주를 포기한 눈망울이 세상을 밀어내지 못했다 내가 하늘 천정을 박차고 싶듯 물 밖의 환한 햇살을 동경도 했겠지만 새의 날갯짓처럼 허공을 헤집고도 싶었겠지만 꿈은 꿈으로 빛날 때가 빛나는 것이라 제자리에서 흔들리며 독한 발자국들로 빈 잔을 채웠으리 간간이 비틀대는 꿈을 수장하며 절규를 불태우는 번개의 막춤을 오직 한 번 보고 싶었지만 파도를 일으키는 건 언제나 이루지 못한 꿈이었지 꿈꿈꿈 (그림 : 윤지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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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 웅변시(詩)/시(詩) 2022. 12. 29. 08:30
가을은 단풍잎 하나로 그것 하나로 하고픈 얘길 다하더군 그대 가슴도 붉어지던가 활활 타버리던가 (그림 : 김정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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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연루와 주동시(詩)/송경동 2022. 12. 29. 08:26
그간 많은 사건에 연루되었다 더 연루될 곳을 찾아 바삐 쫓아다녔다 연루되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 차 주동이 돼 보려고 기를 쓰기도 했다 그런 나는 아직도 반성하지 않고 어디엔가 더 깊이깊이 연루되고 싶다 더 옅게 엷게 연루되고 싶다 아름다운 당신 마음 자락에도 한 번쯤은 안간힘으로 매달려 연루되어 보고 싶고 이젠 선선한 바람이나 해 질 녘 노을에도 가만히 연루되어 보고 싶다 거기 어디에 주동이 따로 있고 중심과 주변이 따로 있겠는가 (그림 : 김봉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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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후명 - 사랑의 힘시(詩)/시(詩) 2022. 12. 29. 08:17
지나온 한 해가 거울 속에 묻혀 있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내 얼굴, 사랑을 기대한다 있는 그대로 없는 그대로 곧이곧대로 보여주는 힘인 사랑을 기대한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내 얼굴에 새겨진 주름은 그때마다 더 깊게 파이고 새로운 날 숨가쁘게 기다리게 했으니 이제 기쁨과 슬픔 함께 버무려 거울 속 침묵의 창고에 간직하련다 가거라, 모든 망령이여 먼 뒷날 비록 다시 모습을 드러내 거울 속에서 절규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없는 그대로 곧이곧대로의 사랑의 힘으로 이 땅에 옳음과 그름을 살피기 위하여 곧이곧대로의 사랑의 힘님께 길을 비켜라 헌날을 데리고 서산을 넘어가 멀리멀리 사라져가거라. 있는 것을 있게 하고 없는 것을 없게 하는 사랑을 위하여 (그림 : 김종훈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