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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 - 지저귀는 저 새는시(詩)/심재휘 2023. 1. 26. 06:35
가끔씩 내 귓속으로 돌아와 둥지를 트는 새 한 마리가 있다 귀를 빌려준 적이 없는데 제 것인 양 깃들어 울고 간다 열흘쯤을 살다가 떠난 자리에는 울음의 재들이 수북하기도 해 사나운 후회들 가져가라고 나는 먼 숲에 귀를 대고 한나절 재를 뿌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열흘 후는 울음 떠난 둥지에 아무것도 남아 있질 않아 넓고 넓은 귓속에서 몇 나절을 나는 해변에 밀려 나온 나뭇가지처럼 마르거나 젖으며 살기도 한다 새소리는 새가 떠나고 나서야 더 잘들리고 새가 멀리 떠나고 나서야 나도 소리 내어 울고 싶어진다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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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석 - 다도해시(詩)/시(詩) 2023. 1. 22. 07:10
외로운 사람이 바닷가에 서서 수평선을 향해 외로움을 던지면 수평선을 넘지 못한 외로움은 솟아올라 섬이 된다 작은 외로움은 작은 섬으로 더 큰 외로움은 더 큰 섬으로 저 많은 다도해의 섬은 외로운 사람이 던진 외로움이다 외로움을 모르거나 외로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지만 외로움을 알거나 외로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섬과 섬 사이에 외로움을 놓는다 눈물은 눈물로 위로하듯이 외로움은 외로움만으로 건널 수 있다 다시는 건널 외로움이 없을 때 비로소 외로움은 수평선을 넘어간다 보라, 저 많은 다도해의 외로운 사람이 던진 외로움을 (그림 : 김정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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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 우리가 만나자는 약속은시(詩)/강인한 2023. 1. 22. 07:01
사람 사는 일이란 오늘이 어제 같거니, 바람 부는 세상. 저 아래 남녘 바다에 떠서 소금 바람 속에 웃는 듯 조는 듯 소곤거리는 섬들. 시선이 가다 가다 걸음을 쉴 때쯤 백련사를 휘돌아 내려오는 동백나무들 산중턱에 모여 서서 겨울 눈을 생각하며 젖꼭지만한 꽃망울들을 내미는데, 내일이나 모레 만나자는 약속 혹시 그 자리에 내가 없을지 네가 없을지 몰라, 우리가 만나게 될는지. 지푸라기 같은 시간들이 발길을 막을는지도. 아니면 다음 달, 아니면 내년, 아니면 아니면 다음 세상에라도 우리는 만날 수 있겠지. 일찍 핀 동백은 그렇게 흰눈 속에 툭툭 떨어지겠지. 떨어지겠지, 단칼에 베어진 모가지처럼 선혈처럼 떨어지겠지. 천일각에서 담배 한 모금, 생각 한 모금. 사람 사는 일이란 어제도 먼 옛날인 양 가물거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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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네 켤레의 신발시(詩)/이기철 2023. 1. 22. 06:53
오늘 저 나직한 지붕 아래서 코와 눈매가 닮은 식구들이 모여 앉아 저녁을 먹는 시간은 얼마나 따뜻한가 늘 만져서 반짝이는 찻잔, 잘 닦은 마룻바닥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소리 내는 창문 안에서 이제 스무 해를 함께 산 부부가 식탁에 앉아 안나 카레리나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가 긴 휘파람으로 불어왔는지, 커튼 안까지 달려온 별빛으로 이마까지 덮은 아들의 머리카락 수를 헬 수 있는 밤은 얼마나 아늑한가 시금치와 배추 반 단의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의 전화번호를 마음으로 외는 시간이란 얼마나 넉넉한가 흙이 묻어도 정겨운, 함께 놓이면 그것이 곧 가족이고 식구인 네 켤레의 신발 (그림 : 최성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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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표 - 다락빌레의 소(沼)로 간 소시(詩)/시(詩) 2023. 1. 20. 09:05
섬 노을이 바다를 펼치면 다락빌레 벼랑 속으로 거친 숨결 하나, 하늘로 간 沼에 소가 있었지 도시의 아파트 한 채처럼 송아지를 분양받은 큰어머니 차양 넓은 햇살이 작은 어깨에 내려앉아 들판의 하루가 감투로 숨 차오를 때 다락빌레 한가운데 沼의 잘근잘근 대는 소리에 잠시 쉬어가고는 했지 하양 떠밀려 오는 벼랑 파도 소리가 무성한 파동을 이끌고 수초의 혼을 빼놓을 때 개구리 숨죽이며 알 낳은 소리, 공기 방울로 터져 나오고 진흙 물뱀 꼬리는 바람의 온기를 감추며 저물어 갔지 어디선가 장수풍뎅이 물가에 지문 찍듯 沼 지천을 쿵쿵 울리며 소의 발굽 소리 다가올 적, 겁 없이 손에 쥐어진 버들 막대 하나 물가에 비친 늙은 호박 같은 엉덩짝을 찰싹 내리치고는 했어 목을 축이는 소의 울음 곁, 하얀 목덜미를 씻는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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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연옥 - 외갓집시(詩)/시(詩) 2023. 1. 20. 08:53
낡은 일기장에는 작은 파편들이 널려있고 가을이 데려 온 바람 놀다간 자리서 햇볕 냄새가 난다 툇마루서 뒹굴던 고슬한 추억 손바닥으로 만지고 쓸어보면 햇살처럼 보드랍고 따뜻해 속절없이 내려놓는 한조각 그리움 찬바람 불어 시린 속 일상 허기 달래면 동강 난 필름 마주보고 웃는다 장독대 항아리 속 웅크리고 있던 홍시 외할머니 손에서 단내를 풍기고 까치밥 쪼던 까치 한낮 풍경이 되다 꼬물대며 하냥 기어가는 사랑의 자취들 우화의 날갯짓 소리에 불빛 찬란하게 몸 바꾼 뜨락 가뭇없이 떠나가는 파편 한 조각 집어 들고 무심의 공덕이라 해조음에 하늘만 본다 (그림 : 공미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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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 밤눈시(詩)/오탁번 2023. 1. 16. 18:04
박달재 밑 외진 마을 홀로 사는 할머니가 밤저녁에 오는 눈을 무심히 바라보네 물레로 잣는 무명실인 듯 하염없이 내리는 밤눈 소리 듣다가 사람 발소리인가 하고 밖을 내다보다 간두네 한밤중에도 잠 못 든 할머니가 쏟아지는 밤눈을 보는데 눈송이 송이 사이로 언뜻 언뜻 지난 세월 떠오르네 길쌈하다 젖이 불어 종종걸음 달려가는 어미와 배냇짓하는 아기도 눈빛으로 보이네 밤눈이 할머니의 빛바랜 자서전인 양 책 묶은 노끈도 다 풀어진 기승전결 아련한 지난 이야기 밤 내내 조곤조곤 속삭이네 섣달그믐 한밤중 할머니의 눈과 귀 점점 밝아지네 (그림 : 김영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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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겸 - 늙은 마을버스의 노래시(詩)/시(詩) 2023. 1. 16. 17:56
다시 돌아가기에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백미러에 어른거릴 때마다 수고와 헛수고는 정거장으로 사이좋게 이어져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비탈을 오른다 패배를 자인하는 것은 쉽지만 재귀되는 비난은 느리게 느리게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길처럼 불행을 재생한다 도로에 난데없이 나타난 강아지처럼 서로의 만남이 재앙의 시발이었던 비운의 시간표 매번 늦고 매번 헐떡이게 하는 최악의 노선도 뙤약볕 내리쬐는 책망의 정거장 지나 비바람 몰아치는 비난의 정거장 향해 오른다 당신이 휘두르는 혀의 채찍에 노새처럼 기어오르는 불쌍한 피학 기계 이제는 더 오르지 못할 것 같다고 모질음 낼 때 불타는 노을이 조금만 더 참으면 이 한살이도 끝이 보인다고 바알간 빛을 던져 엉덩이를 밀어 올린다 악다구니의 생에 갇혀 홀로 버둥대는 기억되지 못할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