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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시표 - 다락빌레의 소(沼)로 간 소
    시(詩)/시(詩) 2023. 1. 20. 09:05

     

    섬 노을이 바다를 펼치면 다락빌레 벼랑 속으로

    거친 숨결 하나, 하늘로 간 沼에 소가 있었지

    도시의 아파트 한 채처럼 송아지를 분양받은 큰어머니

    차양 넓은 햇살이 작은 어깨에 내려앉아

    들판의 하루가 감투로 숨 차오를 때

    다락빌레 한가운데 沼의 잘근잘근 대는 소리에 잠시 쉬어가고는 했지

    하양 떠밀려 오는 벼랑 파도 소리가

    무성한 파동을 이끌고 수초의 혼을 빼놓을 때

    개구리 숨죽이며 알 낳은 소리, 공기 방울로 터져 나오고

    진흙 물뱀 꼬리는 바람의 온기를 감추며 저물어 갔지

    어디선가 장수풍뎅이 물가에 지문 찍듯 沼 지천을 쿵쿵 울리며

    소의 발굽 소리 다가올 적, 겁 없이 손에 쥐어진 버들 막대 하나

    물가에 비친 늙은 호박 같은 엉덩짝을 찰싹 내리치고는 했어

    목을 축이는 소의 울음 곁, 하얀 목덜미를 씻는 큰어머니의 환한 하루가

    이렇듯 흘러가는 어진 눈매에

    느려도 천 리를 가는 황소의 콧김으로

    점점 沼와 뜨겁게 맞닿던 어느 여름날이었어

    꿈결 沼에 비친 낮달을 사각사각 베어 물다

    생이가래 속으로 툭 떨어진 이빨을 찾으려 손을 집어넣던 딸애

    간질대는 물뱀에 울면서 깨어난 다락빌레엔

    종일 비가 내렸고

    웃자란 풀을 쫓다 벼랑 아래로 큰어머니의 황소는 별안간 떨어졌지

    바다는 굵어지는 빗소리에 큰어머니 상혼(喪魂)의 궁핍을 남기고

    그 해, 무른 콜타르 감정이 다락빌레 沼를 자르니

    쭈욱 뻗어나간 신작로에 소금 핀 마른 눈물만 번져갔어

    서쪽 돌 염전 따라 빌레의 명치끝을 밟으면 다락쉼터 표지석을 만날 수 있어

    바람 부는 날 이곳에 서면 수평선 너머로 간 큰어머니의 황소가

    아직도 沼의 잘근잘근 대는 소리를 씹으며

    바다로 터져나간 신음을 삼키는 것 같아 먹먹해지고는 해

    다락빌레 : 제주의 땅이름 형태는 뭍과 다른 점이 많다.

    '다락'은 부엌 위에 이층처럼 물건을 넣어두는 곳이며

    '빌레'는 '너럭바위, 즉 평평한 암반'을 뜻하는 곳으로 '다락빌레'는 합성어로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마을의 "다락쉼터" 옛 지명을 뜻한다.

    (그림 : 손만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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