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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 - 핑퐁게임시(詩)/시(詩) 2022. 12. 27. 11:05
공은 함부로 날뛰는 짐승 같아서 성질머리를 살살 달래주어야 한다 저돌적으로 날아온 공을 되받아 후려친다면 빗나가기 십상 이럴 땐 포물선을 그리듯 부드럽게 넘겨줘야 한다 아무 때나 라켓을 휘두르는 건 하수나 하는 일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서 슬쩍 커트만 찔러줘도 된다 있는 힘껏 스매시를 날리거나 과감한 드라이브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도 때론 필요하다 고수의 테크닉이란 그런 것 공을 갖고 놀 줄 알아야 한다 변화와 코스를 생각하며 포핸드와 백핸드로 요리할 줄 알아야 한다 공은 나의 허점을 집요하게 공략한다 비틀거리는 순간 금방 알아차린다 항상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한다 승패를 가리는 게임의 세계에서 막판엔 누구나 한방에 주저앉는다 한방에 메달을 거머쥐는 자가 있고 한방에 낙향하는 자가 있다 뼈아픈 실책이 평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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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 겨울 들판을 건너온 바람이시(詩)/신달자 2022. 12. 27. 10:57
눈 덮힌 겨울 들판을 건너 온 바람이 내 집 노크를 했다 내가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문은 저절로 열렸고 바람은 아주 여유 있게 익숙하게 거실로 들어왔다 어떻게 내 집에 왔냐고 물었더니 여기 겨울 들판 아닌가요? 겨울 들판만 나는 바람이라고 한다 이왕 오셨으니 따뜻한 차 한 잔 바람 앞에 놓았더니 겨울 들판은 겨울 들판만 마신다고 한다 말이 잘 통했다 처음인데 내 백 년의 삶을 샅샅이 잘 알고 겨울 들판을 물고 와 겨울을 더 길게 늘이고 있다 차가운 것은 불행이 아니라고 봄을 부르는 힘이라고 적어 놓고 갔다. (그림 : 김기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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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령 - 신안 섬 이야기시(詩)/시(詩) 2022. 12. 27. 10:54
태생에 도화살이 끼어 험한 물질에도 자고나면 고운 자태 비라도 젖으면 색기가 도도하다 목포가 애비라고도 하고 잠간 들렀던 이름이 뭐라나 태풍이 애비라고도 했다 다정이 죄라서 각성받이 아이들을 수도 없이 낳았다 아이들은 깨 벗고 즈이들끼리 자라고 어미는 자식들 건사하느라 물질이며 식당일 과수농사 품앗이도 마다않는다 또 태풍주의보가 발령이다 수시로 저 물들이 거칠게 밀려와 추근대니 어쩌겠나 밤톨 같은 섬 하나 낳을밖에 눈 닿는 모든 곳이 온통 뻘밭이라도 어미는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비린 물에 발을 담근다 (그림 : 박석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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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배 - 고래는 바다에서 죽는다시(詩)/시(詩) 2022. 12. 23. 11:26
늙거나 상처가 심해 떠오를 힘조차 없으면 고래는 숨 쉬지 못해 바다에서 죽는다 허파가 터지기 직전의 긴 들숨으로 고래 살아가듯 사랑은 서로의 호흡 가슴으로 마시는 것 고래가 숨 쉬지 못해 바다에서 죽듯 당신 가슴에 사는 내 사랑도 그 가슴에서 죽는다 삶은 들숨 날숨 고르게 쉬는 것 사랑은 마음에 피우는 한 송이 꽃 바다를 사랑한 고래는 바다 깊이 빠져 나오지 못한다 당신 가슴으로 간 내 사랑은 마음 얕고 가벼워 뿌리 내리기 힘들다 고래가 죽은 이유와 사랑이 죽은 이유를 바다와 당신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이다 (그림 : 김규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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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 겨울 둥지시(詩)/김왕노 2022. 12. 21. 07:54
공장에서 돌아온 동생의 옷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종일 기계를 닦고 조여도 늘 헐거워지고 녹슬어가는 동생의 꿈을 위해 겨울이라 손에 쩍쩍 달라붙는 몽키와 스패너로 오늘도 얼마나 이 악물고 닦고 조였을까. 편서풍이 아닌 바람이 사람을 헷갈리게 했다면서 퇴근하는 길에 갑자기 분 바람에 자전거 핸들이 꺾여 공장대로에 내동댕이쳐질 뻔했다면서 안도하는 동생의 말에도 기름 냄새가 났다. 일자리가 없어 야근도 줄어 살 길 막막하다는 말에도 났다. 피곤을 푸는 것은 잠이 제일이라며 서둘러 불을 끈 자취집의 하늘로 늦은 철새가 날고 잠들어도 동생의 몸에서 피어나는 기름 냄새는 겨울에도 지지않는 증오의 이파리 이파리였다. 자취방을 가득 채우고 밤새 서걱대는 증오의 이파리였다 (그림 : 김영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