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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옥 - 화장을 하다가시(詩)/시(詩) 2022. 11. 9. 09:07
나를 그린다 도화지에 덧칠하고 스케치를 한다 눈썹을 달고 콧대를 세우고 도톰한 입술을 그린다 눈가에 시간 들이 주름 사이에 끼었다 내 생각도 그린다 가장 깊숙한 곳에 정점을 그리고 쉽게 지울 수 있는 자리에 방점도 살짝 찍기로 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삐딱한 턱선을 입술을 콧등을 눈썹을 되돌아 수십 번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다가 다시 그린 나 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잘 익은 햇살과 바람, 비가 없이도 화장이 될까 내 얼굴에 나를 심는다 한번 (처음) 심은 속눈썹이 더는 자라지 않는다 (그림 : 곽윤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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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솔 - 우물에도 달이 뜨는 집시(詩)/시(詩) 2022. 11. 9. 08:44
새벽잠 대신 우물 속 초유(初乳) 같이 새콤한 달을 길어 바닥 드러난 쌀독을 달빛으로 가득 채우던 처마 밑 여덟의 재잘거림에도 박꽃 같은 어미 가슴은 조각조각 멍이 들어 광주리에는 아시 삶은 꽁보리밥이 매달려 있고 양은솥 식은 갱시기가 주린 배를 채워주던 소나무 삭정이만으로는 허한 속을 채우지 못한 아궁이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의 첫 개짐을 널름 받아먹고 밤하늘 별자리와 평상위의 재잘거림이 밤이 늦도록 찐 감자와 옥수수를 둘러앉아 먹던 장독대에는 된장 대신 봉숭아가 간장 대신 맨드라미가 다투어 자리하고 달팽이처럼 짊어진 껍질이 세상의 전부인 어미는 어디가고 재잘거림조차 이젠 들리지 않아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린 아! 우물에도 달이 뜨던 그 집 (그림 : 황규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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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녕 - 재떨이시(詩)/시(詩) 2022. 11. 5. 07:18
얼마나 많은 숨소리가 얼마나 많은 근심의 입술이 이 바닥 위에 떨어졌을까? 누렇게 뜬 얼굴들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축축한 그리움 같은 것들을 말려대느라 필시 저 바닥은 절로 눅눅해졌을 것이다 오래 묵은 근심 오래 묵은 사랑 오래 담아 둔 미움 같은 것들이 연기처럼 지나간 자리, 자리 아버지는 30년도 넘게 피운 담배를 얼마 전에 끊으셨다 아버지는 이제 다른 소일거리로 그리움들을 말리곤 하신다 허브 향의 사탕을 깨물거나 껌을 씹거나 그러면서 불태워지는 것들도 있고 끝끝내 타지 않은 채 팽팽한 줄타기를 벌이는 시간도 있다 아, 얼마나 긴 숨들이 이 다리 위를 지나갔을까 아버지의 손때 묻은 재떨이를 씻어 말리다 문득 우우 우울, 깊은 우물의 냄새 아버지가 지나간 자리에 웅크리고 있는 도마뱀 같은 얼룩무늬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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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 염부시(詩)/시(詩) 2022. 11. 5. 07:14
장맛빛처럼 쏟아지는 뜨거운 햇빛 염전이 말라가자 바닷물이 서릿발처럼 각을 세우며 일어섰다 물이 짜디짠 고집을 부리는데 빛의 염색체가 전이되었기 때문 그러므로 소금은 언제나 불덩이 같아 살아있는 것들의 뜨거운 피가 된다 염전에 간 적이 있다 태양이 땀을 뻘뻘 흘리며 바닷물을 끓일 듯 햇빛 내리쬐는데 늙은 염부가 물속에서 소금을 건진다 나는 아직 어려서 어떻게 소금이 만들어지는지를 몰랐지만 그 모습이 하도 신기했다 염부는 밀대로 물 속에서 일렁이는 소금을 마당의 눈 밀 듯 힘겹게 밀어 모았다 뜨거운 소금이 하얀 쌀처럼 쌓이는 동안에도 햇빛은 소금의 짠맛에 간을 더하는데 그 짠맛에 염부의 땀방울을 보탰다 삶은 늘 짜다는데 또다시 염부가 수만 번 밀대질 할 소금들이 땡볕에 살얼음처럼 얼고 있었다 (그림 : 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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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송 - 비를 틀어 놓고시(詩)/시(詩) 2022. 11. 5. 07:11
비를 틀어 놓으면 몇 개의 주파수가 생긴다 오래전에 죽은 애인이 다이얼을 돌려 내게 맞춰 왔다 잡음이 들어가고 소리가 찌그러졌으나 이내 빗줄기 사이로 전파가 흩어졌다 남극이나 북극 같은 곳에서 라디오를 틀면 어떤 소리가 들릴까 신호는 바로 얼어 버리고 빙하 속엔 셀 수도 없는 헤르츠가 갇혀 있을 것인데 어느 나라에선 빗소리 틈에서 씨앗들이 발아하고 수생 식물들이 자란다고 한다 비를 틀어 놓으면 반나절쯤은 꿈과 생시가 서로 뒤바뀌기도 한다 섭씨들이 연결을 시도하면 태어나는 중이거나 목숨이 할당되는 중이라고, 또 한바탕 비 내리는 소리를 서둘러 잠그는 것이다 단절된 사람을 기억하는 것과 기념하는 일은 한 사람을 구축하는 데 드는 광역대에 접속하는 것이라는데 이중창을 오래 들여다보면 마주 보던 입김으로 급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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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권 - 같이 살고 싶은 길시(詩)/시(詩) 2022. 11. 3. 15:49
1 일년 중 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혼자 단풍 드는 길 더디더디 들지만 찬비 떨어지면 붉은빛 지워지는 길 아니 지워버리는 길 그런 길 하나 저녁나절 데리고 살고 싶다 늦가을 청평쯤에서 가평으로 차 몰고 가다 바람 세워 놓고 물어본 길 목적지 없이 들어가본 외길 땅에서 흘러다니는 단풍잎들만 길 쓸고 있는 길 일년 내내 숨어 있다가 한 열흘쯤 사람들한테 들키는 길 그런 길 하나 늘그막에 데리고 같이 살아주고 싶다 2 이 겨울 흰 붓을 쥐고 청평으로 가서 마을도 지우고 길들도 지우고 북한강의 나무들도 지우고 김나는 연통 서너 개만 남겨놓고 온종일 마을과 언 강과 낙엽 쌓인 숲을 지운다. 그러나 내가 지우지 못하는 길이 있다. 약간은 구형인 승용차 바큇자국과 이제 어느정도 마음이 늙어버린 남자와 여자가 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