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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 남산, 11월시(詩)/황인숙 2022. 11. 3. 15:46
단풍 든 나무의 겨드랑이에 햇빛이 있다. 왼편, 오른편. 햇빛은 단풍 든 나무의 앞에 있고 뒤에도 있다. 우듬지에 있고 가슴께에 있고 뿌리께에 있다. 단풍 든 나무의 안과 밖, 이파리들, 속이파리, 사이사이, 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가 있다. 단풍 든 나무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다. 단풍 든 나무가 한없이 붉고, 노랗고, 한없이 환하다. 그지없이 맑고 그지없이 순하고 그지없이 따스하다. 단풍 든 나무가 햇빛을 담쑥 안고 있다. 행복에 겨워 찰랑거리며. 싸늘한 바람이 뒤바람이 햇빛을 켠 단풍나무 주위를 쉴 새 없이 서성인다. 이 벤치 저 벤치에서 남자들이 가랑잎처럼 꼬부리고 잠을 자고 있다. (그림 : 임진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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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만 - 이중섭의 집시(詩)/시(詩) 2022. 11. 3. 15:44
섶섬이 보이는 돌담집에 가면 어른도 벌거벗고 아이가 됩니다 파도는 이중섭이 즐겨쓰는 붓 파도 끝에서 허공으로 몸 뒤집는 그의 붓은 은종이에 엎질러진 바다의 내면 거기에 갇힌 건 그가 처음입니다 벌거벗은 아이가 모래판에서 해와 씨름을 하면 섶섬이 울룩불룩한 파도를 황소처럼 몰고 와 응원합니다 그림자가 돌담에 쌓여 파도가 높아지면 집게발에 잡힌 그리움이 파도 끝에서 해 질 때까지 해 질 때까지 물눈물 피웁니다 그가 마련한 집은 코딱지만한 은박지가 고작이지만 바다는 한 번도 좁다 한 적 없습니다 아직 다 그리지 못한 코흘리개 눈빛 오종종한 은박지에 맡겨놓고 유채만 저 멀리서 손 흔들고 있습니다 섶섬이 보이는 낮은 돌담집에 가면 수만 페이지의 파도를 넘기다 크레용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노을 아이들 얼굴에 덧칠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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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 11월의 기린에게시(詩)/손택수 2022. 11. 3. 15:43
옥탑방의 철제 계단은 여전히 삐걱거리고 있는지, 어쭙니다 당신은 그 계단이 모딜리아니의 여인 목덜미를 닮았다고 하였지요 그 수척하고 해쓱한 목 끝의 옥탑방은 남하하는 철새들이 바다를 건너기 전 날개를 쉬어갈 수 있도록 일찌감치 불을 끈다고 하였습니다 싸우기 싫어서 산으로 간 고산족의 후예였을까요 어느 가을은 가지를 다 쳐버린 플라타너스에게 초원의 기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혹만 남은 가지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일어난 수피가 얼룩을 닮았기 때문만도 아니었어요 저는 기린이 울 줄을 모른다고 하였지만 우리에겐 저마다 다른 울음의 형식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사이 저는 위장이 늘어나서 갈수록 목도 점점 굵어져 갑니다 반성도 중독성이 되어덕지덕지 살이 오르고 있습니다 포도의 낙엽들은 이미 마댓자루 속으로 들어갈 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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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 가죽 장갑시(詩)/시(詩) 2022. 11. 1. 06:29
팔 없는 손이 탁자에 놓여 있다. 할 일을 다 잊은 다섯 손가락이 달려 있다. 손에서 갈라져 나온 손가락처럼 뭔가를 쥐려 하고 있다. 뭔가를 달라고 하는 것 같다. 손가락마다 구부리거나 쥐었던 마디가 있다. 습관이 만든 주름이 있다. 주름 사이에서 몰래 자라오다가 지금 막 들킨 것 같은 손금이 있다. 지워진 지문이 기억을 되찾아 재생될 것 같다. 털과 손톱도 가죽 깊이 숨어서 나올 기회를 틈틈이 엿보고 있는지 모른다. 피도 체온도 없이 손이 탁자에 놓여 있다. 빈 가죽 안으로 들어간 어둠이 다섯 손가락으로 갈라지고 또 갈라지고 있다. (그림 : 이영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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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순 - 돌멩이의 노래시(詩)/시(詩) 2022. 11. 1. 06:26
개울물이 돌 틈을 지날 때면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지 모래밭을 지날 때나 풀뿌리를 스칠 때의 소리가 아니야 그건 돌멩이와 함께 부르는 또 다른 합창인 거지 고요하던 물이 돌멩이 표면을 스치며 흐를 때면 돌 하나하나 마다 그 음이 달라 어느 돌은 매끈하고 동글동글 어떤 건 깨어지고 날카로워 아파서 구르지도 못하고 모래 틈에 박혀 신음하거든 깨어지고 구르며 돌들도 노래를 쓰는 거야 그 몸 전체로 저 소리가 노래인지 울음인지 때론 알 수가 없지 개울가에서 들리는 소리는 돌멩이의 노래를 흐르는 물이 따라 부르는 거야 시간도 그런가봐 사람 하나하나 지나쳐 흐르며 부딪히는 사람마다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을 시간이 흘러가는 곳에 구르는 돌 같은 나는 무슨 음을 낼까 개울가에 앉으면 물소리에 내 귀가 촉촉이 젖어들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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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금선 - 안개역시(詩)/시(詩) 2022. 11. 1. 06:23
스크린 도어가 열리면 밀려 나오는 안개 얼굴과 얼굴이 환승된다 무덤덤한 표정이 차오를수록 내릴 곳은 더 멀어진다 흔들리는 손잡이를 붙잡고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갈까 좌석을 차지한 이들은 손안에 세상을 움켜쥐고 손가락만 까닥거린다 안개는 얼굴들을 지우고 얼굴들은 시간으로 우르르 사라진다 역이 또 한 번 열리면 쏟아져 들어오는 액체성 사람들 물방울이 둥둥, 원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에게 엉겨 오늘의 안개를 내려받기해야겠다 전광판을 바라보지만 내려야 할 역이 줄줄 흘러내려 나는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림 : 남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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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리 - 드르니항시(詩)/시(詩) 2022. 11. 1. 06:16
오래 그리웠던 마음이 쌓이면 멀리 두고 와 흐릿하게 놓아버린 해안에 가닿는다 바다 한가운데 아흔아홉 파도를 몰아와 괭이갈매기 붉은발농게들이 옛사람 얼굴을 하고 어느 날 우리가 서쪽으로 기우는 감정에 이끌려 서로의 저물녘을 어루만지기도 했을 먼 생으로부터 그립다는 말이 도착하고 있는 여기 여럿이 함께 걷고 있어도 먼저 가 있는 사람이 나 같아서 서천에 이르러 한 호흡 숨을 버릴 때마다 온 생이 되살아나고 있는 갯벌 모래 산 너머 백사장은 어딘가로 천리만리 아득히 나를 다시 데려가고 드르니항 : 충청남도 태안군 남면 신온리 일제강점기에 신온항으로 불렸고, 2003년부터 '들른다'라는 우리말을 활용해 드르니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항구는 작은 규모지만 연중 낚시객들로 붐빈다. 대상 어종은 주꾸미를 비롯해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