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
김명리 - 산유리에 해가 진다시(詩)/시(詩) 2022. 10. 10. 08:05
산유리에 닿기 전에 가을 해 지겠네 물길 거세느니 산세 험하느니 해도 거기까지 다다른 막다른 길 있어 산비탈 초입의 느릅나무 노목 아래 평상 놓이고 그 노거수 올봄에 틔운 햇이파리마다 먼지 같은 세월은 머뭇머뭇 반짝이며 앉았다 가겠네 명주 실오라기 같은 초가을 햇살이 조롱조롱한 고춧대 속으로 몰려드는데 인기척 없는 마을의 뚝갈, 까마중, 왕고들빼기 저마다 외로운 고요의 창검으로 울타리 둘렀다 산유리 에워싼 문학산 산그늘이 홍단풍 가지 위로 왁자지껄 내려앉으며 저희는 또 저희끼리 이 길이 생의 막다른 길이어도 좋다고 (그림 : 김정아 작가)
-
심재휘 - 이름없는 그 나무시(詩)/심재휘 2022. 10. 10. 08:02
숲에는 그 나무가 있어서 오늘도 나는 숲을 나와 집으로 간다 숲속에 머물던 시간은 길지 않았으나 갖은 모양의 잎 들 모든 나무들의 이름이야 다 알 수는 없지만 내 물음에 함 께 흔들리던 그 나무의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 이름이야 생각나지 않을 수 있지만 내게 따뜻한 방향을 가리켜주던 그 가지들의 몸짓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 가느다 란 햇살을 내어주던 잎들의 뒤척임을 내내 잊어서는 안 되 겠지 숲 밖은 흐려 곧 비가 올 표정, 나는 집으로 가는 저물녘 저녁은 걸음에 흥건하게 묻고 나는 이름을 묻지 못했구나 숲에는 그저 그 나무가 이름을 잃고 그루터기만 남은 그 나 무가 있어서 찾아갈 때마다 자리가 되어주던 그 나무가 있 어서 아주 오래된 그의 자세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지 (그림 : 심수환 화백)
-
최하림 - 가을 편지시(詩)/시(詩) 2022. 10. 8. 17:40
그대가 한길에 서 있는 것은 그곳으로 가을이 한꺼번에 떠들썩하게 빠져나가고 있다고 나에게 말해 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대가 역두(驛頭)에 서 있다든지 빌딩 아래로 간다든지 우체국으로 가는 것도 수사가 다르긴 하되 유사한 뜻이 되겠습니다 날마다 세상에는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고 바람과 햇빛이 반복해서 지나가고 보이지 않게 시간들이 무량으로 흘러갑니다 그대는 시간 위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대에게 나는 지금 결정의 편지를 써야 합니다 결정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시간 위에 떠 있는 우리는 도무지 시간의 내용을 알 수 없으니 결정의 내용 또한 알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 (그림 : 김기홍 화백)
-
이삼현 - 양파시(詩)/시(詩) 2022. 10. 6. 11:39
아내의 부엌에 까다 만 눈물 한 바가지 담겨있다 나이를 과속할수록 소음이 심한 남편이지만 웃으며 동승해주는 것이 고마워 모처럼 까다만 눈물을 대신 깐다 거친 흙 속에 걸음을 뻗고 쑥쑥 자라오른 흔적 이순으로 접어드는 우리 부부도 이제 성장이었던 뿌리와 줄기는 말라붙고 주먹만 한 결실로 남았다 툭, 던진 한마디에도 쉬 부스러지는 겉껍질 앞만 보며 참고 살아온 모래알 같은 기억 때문이다 단단히 엉겨 붙은 흉터 딱지를 벗겨내니 웅크린 아내의 속살이 비치고 울컥 눈이 아려온다 제 안으로 깊숙이 남편과 자식들을 껴안고 한 겹 두 겹 벗겨낼수록 작아만 가는 오늘 저녁 아내는 한 끼 행복을 위해 무슨 밥상을 준비하려 했을까 다 드러내지 못한 속내를 까며 어떤 그늘에 잠겨 흔들렸을까 손톱을 세워 껍질을 벗겨내야 겨우 ..
-
권상진 - 접는다는 것시(詩)/시(詩) 2022. 10. 6. 11:25
읽던 책을 쉬어 갈 때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는 버릇이 있다 접혀진 자국이 경계같이 선명하다 한때 우리 사이를 접으려 한 적이 있다 사선처럼 짧게 만났다가 이내 멀어질 때 국경을 정하듯 감정의 계면에서 선을 그었다 골이 생긴다는 건 또 이런 것일까 잠시 접어두라는 말은 접어서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포개지라는 말인 줄을 읽던 책을 접으면서 알았다 나를 접었어야 옳았다 이미 읽은 너의 줄거리를 다시 들추는 일보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내 뒷장을 슬쩍 보여주는 일 실마리는 언제나 내 몫이었던 거다 접었던 책장을 펴면서 생각해 본다 다시 펼친 기억들이 그때와 다르다 같은 대본을 쥐고서 우리는 어째서 다른 줄거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진실들이 우리의 페이지 속에는 가득하다 (그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