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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순 - 넝쿨시(詩)/시(詩) 2022. 9. 22. 17:19
화단이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 겁 없는 청춘들입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앞장 선 것은 양다래나무인데 그 기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보자보자하니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단풍나무 그늘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더덕도 살금살금 팔을 들어 올립니다 나팔꽃도 배슬배슬 웃으며 동조를 하고 어디서 굴러 들어온 메꽃도 덩달아 옳소 옳소 합니다 담쟁이는 이미 담장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말리지 않아도 됩니다 가을철 들면 철이 들 것입니다 하늘은 없다는 것, 허공에 헛손질 했다는 걸 알고 노랗게 질리거나 벌겋게 화를 내며 내려앉을 것입니다 지켜만 보던 뿌리에 얼굴을 묻고 흐느낄 것입니다 (그림 : 이상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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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길 - 남포동 연가시(詩)/시(詩) 2022. 9. 14. 19:21
오후 네 시의 햇살이 자갈치 서편으로 서서히 해몰할 즈음이면 다시끔 손톱 밑에서 자라는 그리움 이 어디쯤 이었을까 스무 살 청춘이 방황하던 화석으로 남은 족적들 그리고 해갈되지 못하는 갈증으로 청춘을 청춘인지도 모른 채 뿜어 내 버린 담배연기만 같은 시간들 방파제 선술집에 앉아 혼자 술잔을 기울였다 뇌리를 빠르게 투사하고는 명멸해 버리는 낡은 흑백 필름 같은 기억의 조각들 이 낯선 시간 또한 그리움이 되리라 어제 내가 그랬듯이 그 옛날 스무 살 청춘이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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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민 - 탱자시(詩)/시(詩) 2022. 9. 14. 19:14
노랗게 탱자 알이 익어갈 무렵 여자애 오줌발이 멀리 나가면 멀리 시집간다는 할머니가 들려준 무서웠던 이야기 쬐그만 계집애 오줌을 누며 멀리 시집간다는 그 말에 양 무릎 조아리고 쉬ㅡ소리를 묻었지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 한 뼘 대지의 거름을 만들던 탱자 같은 쬐그만 계집애가 한 뼘 세상 밖에서 칸나의 붉은 노예가 되고 처연하고 축축한 풍경이 되고 누구를 찌르고 다시 찔리는 탱자나무 가시가 되어 파랗게 새파랗게 겨울을 걸었지 그때의 노란 향기 삭제된 파일처럼 날아갔고 고비사막 선인장 같은 쓰디쓴 탱자 맛을 이제야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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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 - 비켜라 밥이다시(詩)/시(詩) 2022. 9. 14. 17:08
서울 어느 시장 골목에서 보았다 쟁반마다 밥이며 찌개를 차려 층층이 머리에 올려 이고 혼잡한 사람들 틈을 헤집고 가던 밥의 길을 비켜라, 밥이 간다 아무도 밥을 막는 사람은 없다 뜨거운 첫 숟갈을 위해 길을 비켜주고 있다 나물무침과 뜨거운 찌개와 구운 생선을 몇 층씩 머리에 이고도 밥의 길은, 밥의 힘으로 휙휙 지나간다 봐라, 밥은 언제나 저렇게 사람의 머리 위에서 아슬아슬하지만 그래도 그 아슬아슬한 것들 말아먹고 비벼 먹으며 사람들은 틈을 비집고 또 살아간다 가지마다 꽃찌개를 펄펄 끓이는 한여름 배롱나무와 간신히 차린 밥을 엎어질 듯 들고 오는 초가을 코스모스 덕분에 바람이 자라고 들판이 살아났다 비켜라, 하늘에 생채기 내던 구름 같은 인파여 툭하면 밥심을 잊어버리는 인파 같은 구름이여 생각하면 세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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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 추석달을 보며시(詩)/문정희 2022. 9. 14. 16:56
그대 안에는 아무래도 옛날 우리 어머니가 장독대에 떠놓았던 정한수 속의 그 맑은 신이 살고 있나 보다 지난 여름 모진 홍수와 지난 봄의 온갖 가시덤불 속에서도 솔 향내 푸르게 배인 송편으로 떠올랐구나 사발마다 가득히 채운 향기 손바닥이 닳도록 빌고 또 빌던 말씀 참으로 옥양목같이 희고 맑은 우리들의 살결로 살아났구나. 모든 산맥이 조용히 힘줄을 세우는 오늘은 한가윗날 헤어져 그리운 얼굴들 곁으로 가을처럼 곱게 다가서고 싶다 가혹한 짐승의 소리로 녹슨 양철처럼 구겨 버린 북쪽의 달, 남쪽의 달 이제는 제발 크고 둥근 하나로 띄워 놓고 나의 추석달은 백동전같이 눈부신 이마를 번쩍이며 밤 깊도록 그리운 얘기를 나누고 싶다. (그림 : 심만기 화백)